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1903–1951)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책(金策, 1903년 8월 14일 - 1951년 1월 31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소련의 군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산업상 겸 민족보위성 부상, 외무성 부상(1948년 9월 2일-1950년 1월 8일)과 내각 부수상을 겸직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창건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 인민군 초기 최고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다.[1] 1933년 10월 10일 그가 만든 주하항일유격대는 1934년 7월 동북반일유격대에 편입되고, 동북반일유격대는 다시 1936년 8월 1일 동북항일련군 제3군에 편입되어 이때부터는 소련 인민군 장교 신분이었다.
김책 金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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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2일 당시의 김책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산업상 | |
임기 | 1950년 5월 2일 ~ 1951년 1월 31일 |
주석 | 김두봉 북조선 국가원수 |
총리 | 김일성 북조선 총리 |
이름 | |
별명 | 주요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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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903년 8월 14일(1903-08-14) |
출생지 | |
사망일 | 1951년 1월 31일(1951-01-31)(47세) |
사망지 |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학력 | 룡정 동흥중학교 중퇴 |
경력 | |
정당 | 조선로동당 |
배우자 | 안경숙 |
자녀 | 김국태(장남), 김정태(차남), 김신태(삼남) |
종교 | 공산주의(무신론자) |
군사 경력 | |
복무 | 동북항일련군 조선인민군 |
복무기간 | 1932년 4월 25일 ~ 1936년 7월 31일 (만주항일유격) 1936년 8월 1일 ~ 1945년 9월 1일 (동북항일련군) 1946년 2월 ~ 1951년 1월 31일 (조선인민군) |
근무 | 소련군 88극동려단 조선인민군 육군 |
최종계급 | |
지휘 | 군사위원회 위원 겸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사령관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상훈 | 북조선 국기훈장 1급 추서 북조선 공화국 영웅 2급 추서 북조선 조국통일상 추서 |
중학교 재학 중 조선공산당 화요파인 동만도지구당 비서 안기성의 권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반체제지하청년단체와 조선공산당 지하기관에 참가했으며 1927년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된 이후 만주지역에서 공산당 조직과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번 투옥당했다.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였고,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따라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다.
1946년에는 조선인민군의 창군 활동과 북조선로동당, 조선로동당 창건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4월의 제1차 남북협상에도 참여하였다.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에 선거되고 북조선 정부 수립 후 산업상으로 민족보위성 부상과 외무성 부상을 겸직했다. 1950년 전선사령부 사령관이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고위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1951년 한국전쟁 중 과로와 심근경색으로 전사하였다. 일설에는 가스 중독 혹은 암살되었다고도 한다.
1951년 2월 19일 함경북도 성진시와 학성군은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 김책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61년 12월 통합하여 김책시가 되었다. 그밖에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공업대학, 김책제철소, 김책공업지구 등이 설립되었다. 김일성의 최측근이다. 김책이라는 이름은 그를 뛰어난 책사라는 뜻에서 붙인 별명이 이름화되었다. 가명으로는 김책, 김락(金樂), 김인식(金印植), 김인식(金仁植), 김홍인(金洪印), 김동인(金東印), 김인(金印)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고, 중국식 이름은 뤄둥센(羅東賢, 나동현)이다. 본명은 김홍계(金洪啓), 자(字)는 홍계(洪啓), 호는 홍계(洪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