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친일파 (1899–1970)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활란(金活蘭, 1899년 2월 27일~1970년 2월 10일)은 일제강점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재단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교육자, 대한민국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다.[2] 초명(初名)은 기득(己得), 아호는 우월(又月), 세례명은 헬렌(Helen), 일본식 이름은 아마기 가츠란(天城活蘭)이다. 이화학당의 고등부를 거쳐 1918년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다가 여자 YMCA를 독립, 1923년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 중앙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조직하였다.
김활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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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년 2월 27일(1899-02-27) 대한제국 경기도 인천 |
사망 | 1970년 2월 10일(1970-02-10)(7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1]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 |
성별 | 여성 |
국적 | 대한민국 |
별칭 | 아명(兒名)은 김기득(金己得) 아호(雅號)는 우월(又月) 세례명은 헬렌 일본식 이름은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
학력 |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
경력 | 제3대 공보처장(1950) 초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1939~1961) |
종교 | 개신교(감리회) |
부모 | 김진연(부), 박도라(모) |
형제 | 김애란(언니) |
배우자 | 없음(독신) |
1923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편입, 1924년 학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 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1926년 9월에는 철학석사를 받았으며,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사와 교감, 부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미국 유학 중 "무지와 구습의 타파"를 이유로 공개 단발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1931년 10월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1936년 전후로 일본의 강경노선에 따라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그는 강연, 논술활동을 하는 한편 1941년 창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1년 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의 무장’, 1942년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는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여러 잡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뒷일은 우리가’,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등의 글을 발표하며 조선 민중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활발하게 종용하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서슴지 않았다.[3]
광복 이후에는 반탁운동에 참여한 뒤 48년 장면, 조병옥과 함께 파리 UN 총회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받고 귀국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전시 내각에 참여했다가 정식 공보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았으며, 언론인으로는 영자(英字)신문사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