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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록 9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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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록 9인(Little Rock Nine)은 1957년 9월 미국 아칸소주의 주도 리틀록의 공립학교인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한 아홉 명의 흑인 학생 어니스트 그린(Ernest Green, 1941년~), 엘리자베스 엑포드(Elizabeth Eckford, 1941년~), 제퍼슨 토머스(Jefferson Thomas, 1942년-2010년), 테렌스 로버츠(Terrence Roberts, 1941년~), 카로타 월스 라니어(Carlotta Walls LaNier, 1942년~), 미니진 브라운(Minnijean Brown, 1941년~), 글로리아 레이 칼마크(Gloria Ray Karlmark, 1942년~), 텔마 마더세드(Thelma Mothershed, 1940년~)와 멜바 빌스(Melba Beals, 1941년~)를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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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홉 명의 흑인 학생이 관계된 사건은 '리틀록의 위기'(Little Rock Crisis)로, 인종차별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1952년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는 대법원에 인종차별로 인한 흑인과 백인의 학교분리현상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고, 1954년 미 대법원으로부터 위헌 판결을 얻어냈으며 그해 5월 17일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이 열렸다.1957년,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에서 우수한 성적과 태도를 기준으로 뽑은 아홉 명의 흑인 학생들은 리틀록 센트럴 하이스쿨(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 등록되었다.
하지만 아홉 흑인 학생들의 첫 등교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많았다. 이 세력을 대표하는 아칸소주 주지사 오발 포버스(Orval Faubus)는 인종차별주의 단체를 지지하여 주방위군을 동원해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다.
이 사건은 이슈화되어 미국 전지역에 알려졌다.[1] 당시의 미국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이 상황을 진정시키기위해 아칸소주 주지사를 소환하는 등 리틀록 사건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그는 또한 주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하는 조치를 취하고, 연방육군 101공수사단을 투입하여 아홉 명의 흑인 학생들의 등하교를 철저하게 보호하려 노력한다.[2]
결국 리틀록 9인은 백인들로부터의 온갖 무시와 고난 속에서도 일년이란 시간의 학업을 마치며 그 해에 중앙고등학교에서는 최초의 흑인 졸업생이 탄생하는데 이는 어니스트 그린이였다.[3][4]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흑인 인권 운동의 대표사례로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