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닛 전투
장미 전쟁의 전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바넷 전투(영어: Battle of Barnet)는 1471년 4월 14일 당시 런던 북쪽의 작은 하트퍼드셔 마을인 바넷(Barnet) 근처에서 벌어진 15세기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 전쟁인 장미 전쟁에서 결정적인 교전이었다. 이 군사작전은 차후의 튜크스베리 전투와 함께 에드워드 4세의 왕좌를 지켜내었다.
바넷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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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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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요크가 | 랭커스터가 | ||||||
지휘관 | |||||||
헤이스팅스 남작 윌리엄 헤이스팅스 |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 | ||||||
병력 | |||||||
7,000–15,000 | 10,000–30,000 | ||||||
피해 규모 | |||||||
1,000 | 10,000 |
바넷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는 요크 가문을 이끌고 헨리 6세를 왕으로 지지한 랭커스터 가문에 맞서 싸웠으며, 랭카스터 가문의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각 왕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두 가문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전투를 장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격돌 중 하나로 간주한다.
이 전투에서의 에드워드 4세와 요크 가문의 승리는 14년 동안 요크가의 잉글랜드 통치로 이어졌다.
이전에 요크 가의 핵심 인물이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에드워드 4세의 족벌주의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비밀 결혼, 외교 정책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랭커스터 가로 이탈하였다. 워릭 백작은 랭카스터가의 군대를 이끌고 이전에 동맹이였던 군대를 물리쳤고, 이에 에드워드 4세는 1470년 10월에 부르고뉴로 도주해야만 했다.
요크 가의 왕인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숙주인 용담공 부르고뉴 공작 샤를을 설득하여 그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도록 도왔다. 1471년 3월 부르고뉴의 돈으로 모인 군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 침공을 시작했고, 이는 1471년 4월 14일, 바넷의 북쪽의 들판에서 절정에 달했다. 어둠 속에서 요크군은 랭커스터군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새벽에 짙은 안개 속에서 격돌했다. 양군이 싸웠을 때, 랭커스터군의 우익인 옥스퍼드 백작은 헤이스팅스 경이 이끄는 반대편의 요크군을 패주시키고 바넷으로 다시 추격했다. 하지만 전장으로 돌아온 옥스퍼드 백작의 우군은 몬태규 경이 지휘하는 랭커스터 중앙군에게 적으로 오인되어 총을 맞았다. 이에 반역의 외침(그 당시는 혼돈의 시대였기에 항상 가능성이 있었다.)이 랭커스터군의 전선을 통해 퍼지면서 랭커스터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결국 많은 이들이 전투를 포기했다. 퇴각하는 동안 워릭 백작은 요크군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워릭 백작은 15세기 잉글랜드 정치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그 누구도 권력과 인기 면에서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워릭 백작의 지원을 받지 못한 랭커스터 가문은 1471년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의 대패로 랭커스터 왕가의 치세가 끝나고 요크 왕가가 복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