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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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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섬 해전(영어: The Battle Of Savo Island)은 제1차 사보섬 전투로도 알려져 있으며, 일본측에서는 제1차 솔로몬 해전(일본어: 第一次ソロモン海戦)이라고 부른다.[2][3] 제 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에서 벌어진 일본 제국 해군과 연합군 사이 해상 전투다. 1942년 8월 8일 ~ 8월 9일 양일간 일어났으며, 과달카날 전역에서 벌어진 첫 번째 주요 해상 교전이었다.[4]
사보섬 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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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의 일부 | |||||||
![]() The USS Quincy, caught in the searchlights from attacking Japanese cruisers, on fire and sinking as a result of numerous gunfire and torpedo hits. The flames at the far left of the picture are probably from the USS Vincennes, also on fire from gunfire and torpedo damage.[1]:30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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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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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 빅토르 크럿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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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5척 |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 | ||||||
피해 규모 | |||||||
중순양함 4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1,077명 전사 | 중순양함 3척 소파, 58명 전사 |
연합군이 솔로몬 제도 동쪽에 상륙하자 일본 해군은 미카와 군이치 제독 지휘 아래 7척 순양함과 구축함 1척으로 대응 함대를 구성하였다. 이 함대는 뉴브리튼섬과 뉴아일랜드섬 기지를 출발하여 뉴조지아 해협으로 남하하였다. 일본군은 상륙부대의 지원함들과 호위선단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연합군의 호위선단은 영국군인 빅터 크루츨리(Victor Crutchley) 제독 지휘하에 순양함 8척과 구축함 15척으로 구성했었으나, 그 가운데 순양함 5척과 구축함 7척만 전투에 참가한다. 야간 작전에서 미카와 제독은 연합군에 대한 완벽한 기습 공격에 성공하였으며, 호주 해군 소속 순양함 1척과 미국 해군 소속 순양함 3척을 침몰시켰다. 반면에 일본군 피해는 매우 경미하였다. 이 전투는 미해군 사상 최악의 패배로 일컫는다.[5]
미카와 제독은 야간 작전 성공 후 날이 밝으면 연합군 항공모함 공격을 염려하여, 남은 연합군 원정군에 대한 소탕 작전을 접고 날이 밝기 전에 철수한다. 이 일본군 공격으로 사보섬 주변 다른 상륙함들과 전투함들도 상륙작전을 위한 하역 작업을 종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철수하여 주변 해역에 대한 재해권이 일본 제국 해군으로 일시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상륙함과 전투함 및 보급선의 철수로 말미암아 이틀 전 상륙작전을 수행한 지상 병력들은 제한된 보급 상황에서 교두보를 사수해햐 했다.
미카와 제독은 연합군 항공모함 공격에 따른 손실을 크게 걱정하여 다른 상륙함과 보급선에 대한 수색 정찰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였으나, 실제로 연함군 항공모함 부대는 작전 반경에 없는 상황이었다. 연합군 역시 일본 해군 공격으로 항공모합 전력 손실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모함 부대는 상당히 후방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연합군 상륙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를 놓쳤으며, 일본군이 과달카날을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또 이 결정적인 순간에 연합군 측에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하지 못함으로서, 연합군이 핸더슨 비행장에 대한 방어를 충분히하여 1942년 말기에 이루어지는 지원군이 올때까지 버틸 수 있게 된다.[6]
사보섬 해전은 과달카날 전역에서 벌어진 5번의 주요 해상, 해상-공중 전투 가운데 하나이며, 일본군 입장에서는 태평양 지역에서 연합군측의 공세에 대한 중요한 반격이었다. 이 전투들은 1942년 11월 30일 타사파롱가 해전까지 이어지며, 1943년 1월 29일 ~ 1월 30일에 벌어진 레넬섬 전투(Battle of Rennell Island)로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