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한 유럽의 예술 사조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아르누보(프랑스어: Art Nouveau, /ˌɑːr(t) 듣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유럽의 예술 사조로서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을 뜻한다. 독일어권에서는 잡지 '유겐트'의 이름을 따서 유겐트 양식(유겐트슈틸)이라고도 불린다. 아르누보 양식이 최고조를 이룬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1890~1905)이다. 아르누보는 19세기 아카데미 예술의 반작용으로 자연물, 특히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적인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Tortona의 화가 Cesare Saccaggi의 아르누보 광고 포스터.](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7/Poster_Rambler_Bicycles.jpg/320px-Poster_Rambler_Bicycles.jpg)
아르누보는 순수 예술(특히 회화와 조각)과 응용 예술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시작된 운동이다. 미적으로 다양하고 국제적일 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디자인, 그래픽 아트, 가구, 유리 예술, 직물, 도자기, 보석 및 금속 공예 등 예술분야 전반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또한 프랑스 건축가 외젠 비올레르뒤크와 영국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과 같은 19세기의 중요한 예술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국 아르누보는 윌리엄 모리스와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았다.[1]
최초의 아르누보 주택과 실내 장식은 1890년대 브뤼셀에서 지어진 폴 앙카르(Paul Hankar) , 앙리 반 데 벨데의 건축물, 특히 1893년에 완공된 빅토르 오르타의 작품이나 Hôtel Tassel의 건축 및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주요하게 나타났다.[2][3][4] 빅토르 오르타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는 새로운 파리 메트로 입구를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었다. 알폰스 무하의 포스터와 르네 랄리크(René Lalique)와 에밀 갈리에(Émile Gallé)의 유리제품 등 그래픽 아트에도 등장했다. 아르누보 양식은 루이 티파니(Louis Tiffany)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시작된 아르누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 국가마다 조금씩 다른 특성을 지니며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수도뿐만 아니라 급성장하는 도시(이탈리아의 토리노와 팔레르모,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독일의 뮌헨과 다름슈타트)와 독립 운동의 중심지(핀란드 헬싱키)등에서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