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대한민국의 배우 (1968–200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최진실(崔眞實, 1968년 12월 24일 ~ 2008년 10월 2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1] 199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텔레비전에서는 김희애·채시라, 영화에서는 강수연·심혜진 등과 트로이카를 구축했으며, 광고계·방송계·영화계에 걸쳐 흥행의 측면에서 연예계 전체를 리드했다.[2]
최진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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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8년 12월 24일(1968-12-24)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사망 | 2008년 10월 2일(2008-10-02)(3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봉안묘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건지미길 5 갑산공원묘원 하늘재 소공원)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88년 ~ 2008년 |
종교 | 개신교 (침례회) |
부모 | 최국현(부), 정옥숙(모) |
친척 | 연출가 최상현(종숙) 최재성(6촌 오빠) |
형제자매 | 최진영(동생) |
배우자 | 조성민 (2000년 결혼 ~ 2004년 이혼) |
자녀 | 최환희(아들) 최준희(딸) |
수상 | 춘사영화상 신인여우 (1990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1991년)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1992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우주연(1994년) 한국모델페스티벌 CF 부문 대상(1995년) 대종상 여우주연상(1995년) SBS 여자 최우수연기상(1994년, 1995년) MBC 연기대상 대상(1997년)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2005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2006년) 제3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공로상(2014년) |
김구라가 최진실을 살인교사로 모함하는 등 억울한 누명으로 자살했다.[3]
1988년 광고 모델로서 연예계에 데뷔하였고 이듬해인 1989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1988년)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여 년 동안 밝은 이미지로 140여 편의 광고, 20여 편의 TV 드라마, 18편의 영화 등에서 주연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4][1][5] 출연한 여러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으로부터 오랫동안 널리 사랑을 받고 연기력 또한 인정받아 국민배우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6]
200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포럼(WEF)이 조사하는 '세계 성 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에서 하위권을 기록하는 국가로서 성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사회였는데, 최진실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차별을 불식시켜나가는 데 이바지한 바 있다는 평가가 있다. 부부 나이 차이 역전, 이혼유책주의(leverage) 활용(레버리지), 친권포기각서 수령, 자녀의 성·본 변경, 친권 자동부활금지 법안 제정 등과 관련하여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었고 아동 인권 수호에도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 타파와 젠더권력 해체에도 이바지하였다.[7][8][9][10][11][12][1][13][14][15][16][17][18][19][20][21][22]
활발한 활동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큰 물음을 던졌으며, 심리적 부검을 통한 문제 해결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렇게 심리적 부검의 중요성이 공유되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난 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교정에 실마리가 제공되었다. 최진실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23][24][25][26][27][28][29][30][31][17][32][33][34][35]
최진실의 죽음은 허위사실유포행위와 관련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연예인의 사회적 위상을 바로잡는 데 영향을 주어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연예인의 소송 제기에 대해 당연한 권리 행사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허위의 사실이 음지에서 흐지부지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투명하게 처리되는 물꼬가 트였다. 또 베르테르 효과에 의해 연예인 한 명이 700명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언론에 대해 파파게노 효과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36][37][38][39][40][41][42][43][25][44][45][31][46][47][48][49][50][51]
성공한 연예인, 성공한 여성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겪었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모순에 눈감지 않고 배우로서 연예인과 여성의 인권 수호에 남달리 관심을 가졌다. 최진실의 삶에는 역사의식, 사회의식, 인권의식이 잘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연예인과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연예계와 여성계를 방어하면서, '허위사실유포에 취약하여 고립되기 쉬운 연예인'이라는 특수한 위치, '부와 명예의 편중이 심한 연예계에서 연예인으로서 대(大)성공한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이지만 주류 사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로 인해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친족, 친구, 친지, 지인 등과의 신뢰 관계에도 균열을 가져오는 여론 조작이라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 대중과의 직접 소통을 지향하는 정면돌파를 택했다.[52][31][53][46][54][55][56][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