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중(高瑩中, 1133년[1] ~ 1208년)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옥구(沃溝), 자는 여회(如晦)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국자시(國子試)에서 시(詩)로 시험을 치러서 장원으로 합격[2]했으며, 1164년(의종 18) 문과에도 급제했다.

이후 황주목사(黃州牧使)·장서기(掌書記), 국학학정(國學學正),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차례로 역임했다.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킨 후 조정에서 금에 고주사(告奏使)를 파견[3]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서경군에 의해 북쪽 길이 막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書記官)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수행했고, 돌아온 후 공을 인정받고 포상을 받아 대관서령(大官署令)·직사관(直史館)으로 승진했다.

이후 다시 당후관(堂後官), 감찰어사(監察御史),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병부낭중(兵部郞中), 이부낭중(吏部郞中)·국자사업(國子司業), 중서사인(中書舍人)·지제고(知制誥)·국학직강(國學直講),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차례로 역임했다.

1199년(신종 2)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었고[4], 이듬해 국자시를 주관하여 진화(陳澕)·노원규(魯元規) 등 102명을 선발했다.[5]

1202년(신종 5) 여러 차례 표문(表文)을 올려 은퇴하기를 청한 끝에 예빈경·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지제고로서 치사(致仕)[6]했다.

이후 최당(崔讜)이 조직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에 참여했으며[7], 1208년(희종 4)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4]

가족

출처는 본인의 묘지명이다.

  • 아버지 - 고돈겸(高惇謙) : 병부상서(兵部尙書)
  • 어머니 - 군기주부(軍器主簿) 박현인(朴玄仁)의 딸
    • 부인 - 검교태자사사(檢校太子司事) 이양서(李陽舒)의 딸
      • 장남 - 고간(高僴)
      • 차남 - 홍조(洪照) : 승려, 고영중보다 먼저 요절
      • 3남 - 고일(高佾)
      • 4남 - 고주(高做)
      • 5남 - 고정(高侹) : 예빈경(禮賓卿)
      • 6남 - 고천(高倩)
      • 첫째 사위 - 최입기(崔立基) : 고공낭중(考功郞中)
      • 둘째 사위 - 김선용(金璿瑢)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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