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기 (조선)
조선의 문신 (1633–1687)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만기(金萬基, 1633년 2월 2일(1633-02-02) ~ 1687년 3월 15일(1687-03-15))는 조선 시대 중후기의 문인·문신 겸 관료 출신이자 척신이다. 병조판서 등을 거쳐 예조판서 등을 지낸 그는 인경왕후의 친정아버지로 숙종의 장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정관재(靜觀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구운몽을 지은 서포 만중은 그의 아우이며, 익훈은 그의 배다른 서얼 숙부이다. 김익희, 송시열의 문인이다. 당색으로는 서인 당원이었다가 서인 분당 시 노론에 가담하였다.
광성부원군 김만기 光城府院君 金萬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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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의 병조판서 | |
임기 | 1673년 ~ 1674년 |
군주 | 현종 이연 |
조선국의 예조판서 | |
임기 | 1674년 ~ 1675년 |
군주 | 현종 이연 숙종 이돈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33년 2월 2일(1633-02-02) |
사망일 | 1687년 3월 15일(1687-03-15) (향년 54세) |
국적 | 조선 |
경력 | 예조참판 |
정당 | 서인 후예 성향 노론 세력 |
부모 | 김익겸(부), 해평 윤씨 부인(모) |
형제자매 | 김만중(아우) |
배우자 | 서원부부인 청주 한씨 |
자녀 | 김진구(장남) 김진규(차남) 인경왕후 광산 김씨(딸) 김진서(삼남) |
친인척 | 김춘택(친손) 김익희(이복 적출 백부) 김익훈(이복 서얼 숙부) |
종교 | 유교(성리학) |
웹사이트 | 김만기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상훈 | 보국숭록대부 |
1652년(효종 2) 생원·진사시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165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659년 효종이 죽고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 논쟁이 발생하자,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을 따라 기년복설을 지지하였다. 1666년(현종 7)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1671년(현종 13) 딸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국혼을 하고, 1674년 사위 숙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로 승진하고 광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1671년 예조참판으로 승진한 뒤 승문원 제조, 오위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 병조참판 등을 거쳐 1672년 성균관대사성과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고,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673년 병조판서, 춘추관지사,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하고, 1674년 보국, 돈령부영사가 되었으며 2차 예송 논쟁 때에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역임했다. 1680년 김석주, 김익훈 등과 함께 남인 타도에 앞장섰다. 1680년 허영, 허새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관에 책록되고 풍정도감 도제조를 역임했다. 사후 부조지전을 받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