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바르 학살
크로아티아 부코바르에서 일어난 학살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부코바르 학살(크로아티아어: pokolj u Vukovaru), 또는 부코바르 병원 학살, 오브차라 학살(크로아티아어: Pokolj na Ovčari)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도중인 1991년 11월 20일 부코바르 동남쪽의 오브차라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가 인계한 크로아티아인 포로와 민간인을 세르비아계 준군사가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은 부코바르 전투가 끝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영토방위군, 인근 세르비아 지역에서 모집한 민병대가 부코바르를 장악한 직후 일어났다. 부코바르 학살은 일어난 시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학살이자 전쟁범죄이다.
부코바르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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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
크로아티아 내 부코바르의 위치. 1991년 말 기준 유고 인민군 및 세르비아군이 장악한 영토는 빨강으로 칠해져 있다. | |
위치 | 크로아티아 부코바르 외곽 그라보보 |
좌표 | 북위 45° 17′ 44″ 동경 19° 03′ 33″ |
발생일 | 1991년 11월 20일 |
대상 | 크로아티아인 포로 및 민간인, 일부 세르비아인, 무슬림, 헝가리인 |
종류 | 대량 살인, 즉결처형, 민족 청소 |
사망자 | 200명 사망 및 현장 발굴 추가 실종자 및 사망자 약 60명 |
공격자 |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영토방위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세르비아계 민병대 |
부코바르 전투 마지막 날, 크로아티아 지역 정부, 유고 인민군, 유럽 공동체 감시 임무 세 세력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협력으로 부코바르 병원에서 대피를 도와주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유고 인민군은 적십자를 병원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막고 병원 안에 있던 사람들 약 300명을 끌어내버렸다. 병원에서 끌어내진 사람들은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 자원한 외국인 2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처음에는 부코바르에 있는 유고 인민군 막사로 이송되었다. 몇몇 포로는 병원 직원으로 확인되어 무리에서 빠져 병원으로 돌려보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부코바르 동남쪽에 있는 오브차라 농장으로 끌려갔다. 농장에 도착하자 유고 인민군이 농장에서 철수하기 전 수 시간 동안 포로들은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이후 유고 인민군은 포로를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영토방위군 세력에게 인계했다. 포로들은 준비된 장소로 옮겨져 10~20명의 무리로 묶여 총살당한 후 집단무덤에 묻혔다.
집단묘지는 1992년 10월 발견되었으며 연초 부코바르 지역에 배치된 유엔보호군(UNPROFOR)에게 인계되어 보호받았다. 1996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의 조사단이 발굴을 한 결과 무덤에서 유골 200명분이 발견되었다. 크로아티아 측은 61명이 더 살해되었으나 다른 무덤에 묻혔다고 주장했으며 ICTY 검찰 측에서는 60명이라고 추정했다. ICTY는 부코바르 학살을 벌인 혐의로 유고 인민군 장교 2명을 기소했으며 전 세르비아의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부코바르에서 일어난 학살을 포함한 수많은 전쟁 범죄를 일으킨 혐의로 기소하였다. 밀로셰비치는 재판이 끝나기 전 교도소에서 옥중 사망하였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영토방위군 소속 병사들 및 세르비아계 민병대 대원 수 명도 부코바르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세르비아 사법부에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5년 2월, 국제사법재판소는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일어난 포위전, 학살, 기타 동시다발적 반인륜적 사건들이 제노사이드 혐의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집단무덤 현장에는 기념비 및 오브차라 농장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포로들을 수용한 건물이 표시되어 있으며 2006년 이 건물은 기념센터로 개축되었다. 2014년 7월까지 기념센터엔 관광객 50만명이 다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