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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광(柳子光, 1439년[1] ~ 1512년 6월)은 조선국 한성부 판윤 직책을 지낸 조선 시대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간략 정보 류자광柳子光, 임기 ...
류자광 柳子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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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의 한성부 판윤 | |
임기 | 1487년 음력 6월 8일 ~ 1487년 음력 6월 13일 |
군주 | 조선 성종 이혈 |
이름 | |
별명 | 자(字)는 우후(于後)[1], 작위는 무령군, 무령부원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39년[1]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영광 |
사망일 | 1512년 6월 (향년 74세)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해평 |
경력 | 조선국 의정부 좌찬성 겸 영경연사 |
정당 | 훈구파 세력 |
부모 | 류규(부), 나주 최씨 첩실(모) |
형제자매 | 류자환(이복 형) 류자석(이복 형) 류자형(동복 남동생) |
배우자 | 죽산 박씨 부인 |
자녀 | 류진(장남), 류각(차남), 류방(삼남) |
친인척 | 박치인(장인) 류승건(손자) 류승곤(손자) |
군사 경력 | |
복무 | 조선 육군 |
복무기간 | 1467년 ~ 1468년 |
최종계급 | 대광보국숭록대부 |
지휘 | 선략장군 |
주요 참전 | 이시애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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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후(于後)[1].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황해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찬성, 겸 영경연사, 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그 남자의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다. 특히 임사홍 등과 함께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도왔다. 사림파 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10년 이후 그를 옹호하는 견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술, 음악, 지리에도 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