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인천직전/연습장: 용기병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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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병 작전 또는 영어로 드라군 작전 (초기에는 앤빌 작전)은 1944년 8월 15일 연합군의 남부 프랑스 침공에 붙은 암호명이다. 작전은 초기에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과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이용 가능한 물자의 부족으로 양동 작전은 취소되었다. 1944년 7월 노르망디의 항구들이 연합군의 물자를 적절히 수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작전은 재검토되었다. 동시에 프랑스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군 대다수를 포함시키기 위해 작전의 부활을 추진했다. 그 결과 7월 작전은 8월에 실행하기로 승인되었다.
용기병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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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전구 및 서부 전선의 일부 | |||||||
용기병 작전의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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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해군만 참전 | 나치 독일 | ||||||
지휘관 | |||||||
제이콥 L. 데버스 |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 ||||||
군대 | |||||||
레지스탕스 | |||||||
병력 | |||||||
초기 상륙 |
초기 상륙 | ||||||
피해 규모 | |||||||
전체: 최대 21,000명 | 전체: 최대 159,000명 |
작전의 목표는 프랑스의 지중해 해안에 접한 중요한 항구를 확보하고 제2의 전선을 열어 독일군 병력에 압박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특공대의 예비 작전 몇 개가 실행된 이후, 미국 6군단이 대규모 해군 기동대의 호위 하에 코트다쥐르에 상륙했고, 프랑스 B군의 몇몇 사단이 미군에 뒤이어 상륙했다. 연합군은 독일 G 집단군의 분산된 병력과 교전을 벌였으나, 쓸모 없는 장비를 갖춘 3급 부대인 동방 부대를 대체하고 다른 전선으로 사단을 배치한 B 집단군은 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연합군의 공중권 우위와 레지스탕스의 대규모 봉기로 인해 방해받던 독일군은 곧 패배했다. 독일군은 디종에서 안정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론 강의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의 기동 부대는 독일군을 추월하여 부분적으로 몽텔리마르에서 그들의 도주로를 막았다. 뒤따른 전투는 교착전이 되었고, 독일군이 그들의 철수를 완료하고 마을에서 퇴각할 때까지 양측 모두 결정적인 돌파구를 만들지 못했다. 독일군이 철수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마르세유와 툴롱을 점령했고, 두 항구는 작전에서 곧 사용되었다.
독일군은 디종을 사수할 수 없었고, 남부 프랑스에서 완전한 철수를 명령했다. G 집단군은 연합군이 추격했기 때문에 더욱 북쪽으로 철수했다. 전투는 G 집단군이 안정화된 방어선을 구축한 보주 산맥에서 종결되었다. 오버로드 작전에 참여한 연합군 부대와 만난 이후 연합군 병력은 재편성이 필요했고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공세는 9월 14일 중단되었다. 용기병 작전은 연합군에게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전 당시 연합군은 남부 프랑스를 해방하는데 4주 밖에 걸리지 않았고, 정예 독일군 부대들이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해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이 점령한 마르세유와 툴롱은 운용되었고 이는 연합군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