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세조 찬위에 반대하여 단종 복귀를 꾀하다 처형당한 여섯 신료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사육신(死六臣, 문화어: 사륙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1]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생육신이 세조와 덕종, 예종 삼부자를 연회장에서 척살할 계획으로 성승, 박쟁을 별운검으로 세조 3부자의 뒤에 세웠다가 3부자의 목을 벨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동조자 중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관련자 500~800여 명이 처형, 학살되었으며, 사육신 중 현재 박팽년과 하위지만이 직계 후손이 전한다.
그 밖에 생육신 가문의 가까운 친인척 중 살아남은 인물은 이개의 종증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고 종고손은 북인당수 이산해였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성담수가 사육신 성삼문의 6촌 동생이었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들의 종과 노리개, 첩으로 분배되었으며 권영금 같은 이는 권람의 친족인 덕에 욕을 모면하였다. 사육신은 성종 때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가 나타나 동정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때부터 영조 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었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어느 스님이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년 기록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박팽년을 비롯한 성승·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렸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그 결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되었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유응부·박팽년·성삼문·이개의 묘에, 하위지의 가묘(假墓)를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유응부·박팽년·이개·유성원·성삼문·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일부의 김문기의 후손들이 역사를 부정하는 행동을 하는데 그것은 유응부장군의 명예를 훼손 하는것이다 유응부의 충절을 무시하는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 실록에도 유응부의 대한 기록이 나오고 육신전에도 나오는 유응부의 기록을 무시한다면 어떤사람이 역사를 믿겠냐 적당히 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