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공방전 (1099년)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예루살렘 공방전 (1099년 6월 7일 – 1099년 7월 15일)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유럽 십자군이 일으킨 전투이며, 이 결과로 이슬람 세력의 파티마 칼리파국한테서 성도 예루살렘의 점령으로 이어졌고, 거의 2세기간 이어진 기독교 세력인 예루살렘 왕국의 토대를 이루었다. 예루살렘 점령은 1095년에 시작된 성지를 점령하려는 제1차 십자군의 마지막 주요 전투였다. 이 공방전에 대한 다수의 목격담이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그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익명의 작가가 쓴 '게스타 프랑코룸'이다.
간략 정보 예루살렘 공방전, 날짜 ...
예루살렘 공방전 | |||||||||
---|---|---|---|---|---|---|---|---|---|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일부 | |||||||||
에밀 시뇰의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1847년 캔버스에 유화) | |||||||||
| |||||||||
교전국 | |||||||||
십자군 | 파티마 칼리파국 | ||||||||
지휘관 | |||||||||
부용의 고드프루아 툴루즈의 레몽 4세 노르망디의 로베르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불로뉴의 우스타슈 3세 오트빌의 탕크레 루시용의 지라르 1세 베아른의 가스통 4세 베렝게르 라몬 2세 굴리에모 엠브리아코 | 이흐티카르 알다을라 | ||||||||
병력 | |||||||||
총 병력은 알려지지 않음[5] | |||||||||
피해 규모 | |||||||||
~3,000명[8] | 막심한 피해 (수비대가 전멸하고 거주민 3,000–70,000명 학살[9] |
닫기
세속 국가 건설이 선포가 이뤄지던 때, 십자군 지도자 중 주요 인물이던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통치자로 선출되었으나, '왕'이라는 칭호는 피했다. 이 공방전 이후에 수 천 명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과 성전산이 기독교 성소로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