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 (1629–1714)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윤증(尹拯, 1629년 7월 18일(음력 5월 28일) ~ 1714년 3월 9일(음력 1월 3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본관은 파평.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당색은 서인에 속하는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된다.
유계(兪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논쟁(회니시비)과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효종 때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현종 때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1682년 관계에 나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렀으나 사퇴하였다.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1673년부터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 송시열 비난 서신의 전달 등으로 송시열과 절교하여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공동 저서 <가례원류>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사망한다.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나 <가례원류> 문제로 후에 그의 관직도 추탈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