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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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李玄逸, 1627년 1월 11일 - 1704년 10월 3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남인 중신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조선 현종, 숙종 때의 남인 중진으로 남인의 이론가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이현일은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태어났으며, 이황의 적통인 류성룡, 김성일의 학통을 모두 이은 퇴계학파의 적통인 외조부 장흥효와 중형 이휘일을 사사하였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인조 26)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그 뒤 1668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1652년(효종 3)에는 형 이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 저술에 참여하였다. 1666년(현종 7)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김수항 등의 기년복 예론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숙종 초에 학행(學行)으로 미수 허목(眉叟許穆)과 백호 윤휴 등의 추천을 받고 지평에 특채되었나 견해를 다소 달리하였다. 좨주(祭酒)·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그 후 이조참판으로서 세자시강원찬선(贊善)이 되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조사기(趙嗣基)의 죄를 구원하려 하다가 함경북도 홍원군(洪原)으로 귀양 갔으나, 서인 사헌부장령 안세징(安世徵) 등의 계속된 핵청(覈請)으로 종성군에 이배됐다가 곧 석방되었다.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이론가로 출사하였으나 허목, 윤휴 등 북인계 근기남인과는 견해를 다소 달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영남 남인과 퇴계학파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 확대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가 1699년 방귀전리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후에 이이의 견해를 논파하는 견해를 짓기도 했다. 서인과 노론의 종주인 이이의 학설을 정면 비판한 덕에 관직과 사후에 내린 시호를 여러번 거두어 들이기까지 했으며 문집을 간행했을 때 관할 수령을 파면시키고 문집들은 수거하여 불살랐다. 그 뒤 추탈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1909년에 가서야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홍범연의(洪範衍義)》 등이 있다.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석계 이시명과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장계향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 장흥효와 중형 이휘일의 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