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피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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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조르주 피카르(Marie-Georges Picquart, 1854년 9월 6일 ~ 1914년 1월 19일)는 프랑스 보병장교 출신으로 제 3공화국 시절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896년 참모본부 정보국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1]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의 당사자인 드레퓌스 대위가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가장 많이 노력했던 중심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백한 증거와 함께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사건을 은폐하려는 군수뇌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묵살당했으며[2], 진상조사를 계속 진행하다가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좌천당했다.[3][4]
마리 조르주 피카르 | |
출생일 | 1854년 9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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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
사망일 | 1914년 2월 19일 (60세) |
사망지 | 프랑스 아미앵 |
복무 | 프랑스 |
복무기간 | 1872–1902년, 1906–1914년 |
근무 | 프랑스군 |
최종계급 | 사단장 (Général de division) |
지휘 | 제2군단 |
기타 이력 | 국방부장관 |
묘소 | 페르 라셰즈 묘지 |
1898년 간첩행위의 진범이었던 에스테라지 소령이 고발되어 군사재판이 진행되었으나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로 석방되었다.[5] 그후 조작된 증거들을 토대로 오히려 피카르 중령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재판결과에 분노한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드레퓌스 사건이 정치쟁점화되었다. 1899년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으나, 유죄가 선고되며[6] 피카르 중령의 명예회복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1906년 7월 12일에 열린 드레퓌스 사건의 2차 재심에서 드레퓌스 대위의 범죄혐의 자체가 군수뇌부에 의해 조작된 간첩사건임이 밝혀지면서 피카르 중령의 명예 회복 절차가 진행되었다.[7] 그는 준장으로 진급하며 군에 복직하였고 같은해 국방장관으로 입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