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락스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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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락스칼란(나와틀어: Tlaxcallān [tɬaʃ.ˈká.lːaːn̥])은 오늘날의 멕시코 중부에 위치했던 알테페틀(민족적 도시국가)이다. 틀락스칼란의 거주민족을 틀락스칼텍이라 했다. 스페인의 아스텍 정복 당시 틀락스칼란은 스페인 정복자들과 동맹하여 아스텍을 공격했고 아스텍의 멸망에 크게 일조했다.
틀락스칼란 동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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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ahtōlōyān Tlaxcall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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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틀락스칼라 | |||
정치 | ||||
정치체제 | 도시국가연합 | |||
틀라토아니 1348년 | 쿨루아테쿠틀리 | |||
인문 | ||||
공용어 | 나우아틀어 | |||
인구 | ||||
1519년 어림 | 300,000명 | |||
경제 | ||||
통화 | 카카오 | |||
종교 | ||||
종교 | 아스텍 종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멕시코 |
틀락스칼텍은 고전후 시대 말기에 멕시코 중부에 도달해 멕시코 계곡의 텍스코코 근처에 처음 정착했다.[1] 몇 년 후 멕시코 계곡에서 쫓겨나 동쪽으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세 개의 집단으로 흩어졌다. 한 집단은 북쪽으로 향해서 오늘날의 이달고주로 갔고 다른 한 집단은 텍스코코 주변에 머물렀으며 마지막 한 집단이 오늘날의 틀락스칼라 계곡에 도달해 쿨우아테쿠틀리 쿠아넥스의 영도 하에 테페틱팍을 세웠다.
이후 틀락스칼텍 국가는 팽창을 시도하여 오코텔룰코와 티자틀란을 개척했다. 그리고 멕시코 계곡에 남았던 틀락스칼텍들이 네 번째 틀락스칼텍 도시국가인 퀴아우이스틀란을 세웠다.[1]
고대 틀락스칼란은 50-200 명의 공직자들로 이루어진 평의회가 통치하는 공화국이었으며, 이 평의원 공직자를 테욱틀리(teuctli), 복수형은 테테욱틴(teteuctin)이라고 했다(Fargher et al. 2010). 테테욱틴은 국가에 봉사함으로써 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봉사란 대개 전쟁을 의미했다. 필리(pilli, 귀족)와 마케우알리(macehualli, 평민) 모두 공적을 세우면 테욱틀리가 될 수 있었다.
틀락스칼란은 근처의 아스텍 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지 않았다. 아스텍은 대신 틀락스칼란을 소위 꽃 전쟁이라 불리는 인신공양 제물 조달용 전쟁 대상으로 삼았다.
틀락스칼란은 스페인인들과 연합해 아스텍을 멸망시켰고, 스페인 식민 치하 멕시코에서 상당한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원주민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 도시와 거주민들은 스페인 정복에 뒤따른 거대한 파괴를 피해갈 수 있었다.
정복자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수기에서는 스페인군과 틀락스칼텍의 첫 접촉 때 있었던 전투가 예상외로 어려웠으며, 시코텐카틀 1세와 막식스카틀이 전쟁 지도자 시코텐카틀 2세를 설득하여 전투를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정복자들이 다 죽을 수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시코텐카틀 2세는 나중에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때 탈영하려 했다가 붙잡혀 틀락스칼란 공화국 평의회에게 유죄를 선고받고 1521년 4월 코르테스가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틀락스칼텍은 아스텍에게 피지배 민족으로 핍박받아왔기에 아스텍에 대한 복수심에 차 있었고 스페인의 충실한 우군이 되었다. 스페인인들이 테노치티틀란에서 일시 축출되었을 때(눈물의 밤)도 틀락스칼란은 스페인인들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스페인의 과테말라 정복에 참여해 돕기도 했다.[2]:140–188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이 완료된 이후 틀락스칼란은 이전의 4개 알테페틀을 그대로 계승한 4개의 유럽식 봉건영지(세뇨리오스)로 재편되었다. 이때 4대 가문 또는 혈통이라는 것이 출현해 각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족보를 조작하기도 했다(Gibson 1952).
이후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에서 틀락스칼텍은 다른 원주민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1519년에는 30만 명이던 인구가 한 세기 뒤 1625년에는 700명으로 급감했다. 유럽에서 옮겨온 전염병, 이주 및 이민, 멕시코 계곡 관개를 위한 노치스통고 운하 건설에 동원된 것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