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가나-코트디부아르 관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가나-코트디부아르 관계
Remove ads

가나-코트디부아르 관계가나코트디부아르 간의 외교 관계를 말한다. 두 국가는 모두 유엔 회원국이다.

간략 정보 코트디부아르, 가나 ...

역사

요약
관점

킨탐포 문화 (기원전 2500년~1500년)의 유물과 인골은 코트디부아르에서도 발견되었다.[1][2] 중세 시대에 가나 서부와 코트디부아르 동부 일부는 보노만자만 왕국의 발상지였다. 자만은 18~19세기에 아샨티 제국의 정복을 받아[3] 코모에강까지 영향을 미쳤다.[4] 18세기에는 오포쿠 와레 1세 사후 아샨티 제국 내에서 발생한 계승 분쟁으로 인해 포쿠 여왕아샨티인 일부를 이끌고 코트디부아르로 이동했으며, 이들의 후손이 오늘날의 바울레인이다.[5] 자만은 1874년 앵글로-아샨티 전쟁 이후 독립을 얻었으나, 1885년 북부 코트디부아르를 지배하던 와술루 제국에 흡수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국은 와술루 정복에 성공한 뒤 1897년 자만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편입시켰다. 한편, 가나 전역은 20세기에 이르러 영국령 골드코스트의 일부가 되었다.

20세기에는 두 나라 모두 가나-토고 관계와 유사한 부침을 겪었다. 1984년 초, PNDC 정부는 코트디부아르가 가나 반체제 인사들에게 가나에 대한 사보타주 활동의 근거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가나는 또한 코트디부아르가 범죄 혐의로 수배된 정치 선동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1988년 이후 가나와 코트디부아르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1989년에는 15년 동안 진전이 없던 양국 간 국경 재획정 위원회가 마침내 양국을 가르는 640km 국경의 정의에 합의했다. 이후 PNDC 정부는 코트디부아르 및 토고와의 교통, 통신 연결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두 나라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속했다.[6]

1992년 무렵, 가나는 코트디부아르와 비교적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 말과 1994년 초의 몇몇 심각한 사건으로 이러한 기대는 무너졌다. 사건은 1993년 11월 1일, 코트디부아르 축구팬들이 쿠마시에서 열린 챔피언십 경기에서 자국 팀이 탈락한 뒤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코트디부아르 내 가나 이민자들이 폭력적 공격을 받았고, 4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수십 명의 가나인들이 목숨을 피해 도망치며 재산을 잃었고, 약 1,000채의 주택과 사업체가 약탈당했다. 코트디부아르에 거주하던 약 100만 명의 가나인 중 1만 명 이상이 가나 정부에 의해 즉시 대피했고, 3만 명 이상이 가나 및 우호국 대사관에 피신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두 나라 정부는 20명(각국 10명)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설립해 공격 사건을 조사하고, 피해 보상 방안을 마련하며,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논의했다. 1994년 10월에는 토고 대표단의 중재로 양국이 축구 경기를 재개했다.[6]

Remove ads

각주

외부 링크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