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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프랑수아 두아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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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프랑수아 두아이앙(프랑스어: Gabriel-François Doyen, 1726년 5월 20일~1806년 3월 13일)은 프랑스의 화가로, 주로 역사와 신화적 요소가 담긴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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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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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장식업자로 활동했던 두아이앙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두아이앙이 예술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두아이앙은 12살 때부터 샤를앙드레 반 로 밑에서 장식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급속한 발전을 이루며 1748년 20세의 어린 나이에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수상의 보상으로 두아이앙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1752년에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 들어간 후 팔레르모에 머물렀다. 그는 베니스, 볼로냐, 토리노 등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도메니키노, 안니발레 카라치,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줄리오 로마노 및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공부했다.[1] 두아이앙은 베니스에 있는 동안 티치아노 베첼리오와 같은 유명한 색채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2]
1755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폄하를 받았지만, 명성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두아이앙은 1758년에 《버지니아의 죽음》을 전시하여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고 1761년에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1]
두아이앙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을 방문한 후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1773년 생로슈 교회에 그린 《Ardents의 기적》(Le Miracle des ardents)이 루벤스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1767년 살롱에 전시되었는데, 소묘화가 샤를제르맹 드 생토뱅이 그의 '1767년 살롱 풍경'에 이를 기록했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마이클 레비는 이 그림을 작가의 작품 경력 중 '절정'이라고 묘사하며, 이 작품의 극적인 면이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를 특징 짓는 첫 작품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작품 속 전경의 몸부림 치는 인물들이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 묘사된 인물들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했다.[3]
1773년, 두아이앙은 에콜 밀리테르(군사 학교) 예배당의 대제단을 위해 《성 루이스의 마지막 성찬식》을 그렸다. 이 그림은 그가 영향 받았던 도메니키노의 《성 제롬의 마지막 성찬식》을 연상시키며, 대제단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강렬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두아이앙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은 앵발리드 예배당에 그린 《테티스의 승리》이다. 1776년에 그는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었다.[1] 17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의 스타일은 유행을 타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초기 그는 국립 박물관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미술품 보관소를 만들었다.[4] 그러나 1792년 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를 떠나 러시아 제국으로 향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여러 궁전을 장식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로는 안드레이 이바노프가 있다.[1] 두아이앙은 18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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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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