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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사노 히로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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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사노 히로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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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사노 히로쓰네(일본어: 上総 広常(かずさ ひろつね), 일본어 구자체: 上總 廣常)는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의 무장(武将), 호족(豪族), 가즈사 씨(上総氏)로 가즈사노곤노스케(上総権介) 다이라노 쓰네즈미(平常澄)의 여덟째 아들(적남).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일본어: 上総介 広常(かずさのすけ ひろつね), 일본어 구자체: 上總介 廣常)의 호칭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가즈사노스케는 관위이고 본명은 다이라노 히로쓰네(일본어: 平 広常(たいら の ひろつね))이다.

간략 정보 시대, 사망 ...

보소 헤이시(房総平氏)의 소료케(惣領家)의 수장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거병에 호응하여 헤이케(平家)와의 전쟁에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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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다. 그의 통칭 '스케노 하치로'(介八郎)에서 미루어 그가 여덟째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아버지 쓰네즈미는 확실한 사료에는 '전임 곤노스케'(前権介)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고, 여러 계도(系図)에는 '가즈사노스케'(上総介)라고 하였다.[2] 12세기 말, 가즈사 국(上総国)의 현지 공령(公領) ・ 장원(庄園)은 가즈사 씨가 그 대부분을 거의 제 소유인 양 다스리고 있었고, 히로쓰네는 이러한 일족의 가독(家督)이자 소료(惣領)로써, 그리고 가즈사 관아(国衙)의 가장 유력한 재청(在庁)인 '곤노스케'(権介)로써 거의 1개 구니(国) 규모로 봉건적인 군사체제를 확립해가고 있었다.[3]

헤이지의 난과 가독 분쟁

히로쓰네는 가마쿠라(鎌倉)를 본거지로 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노토(郎党)였다. 호겐(保元) 원년(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는 요시토모에 속했고, 헤이지(平治) 원년(1159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는 요시토모의 장남인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를 따라 활약하여 요시히라 17기(騎)의 하나로 꼽혔다. 헤이지의 난이 요시토모측의 패색으로 짙어지게 되자, 헤이케(平家)의 탐색을 뚫고 전선을 이탈하여 령국 가즈사로 돌아온다.

요시토모가 패한 뒤에는 헤이케를 따랐으나, 아버지 쓰네즈미가 사망하고 적남인 히로쓰네와 그의 서형(庶兄)인 쓰네카게(常景)나 쓰네시게(常茂)와 가즈사 씨 가독을 놓고 내분이 벌어졌고, 형제간의 항쟁은 훗날 요리토모가 거병할 무렵까지도 수습되지 않았다.

지쇼(治承) 3년(1179년) 11월, 헤이케의 유력 게닌(家人) ・ 이토 다다키요(伊藤忠清)가 가즈사노스케(上総介)로 임명되자 히로쓰네는 가즈사의 정무를 둘러싸고 다다키요와 대립하게 되었고,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요리토모가 거병했을 때 히로쓰네(및 다른 종형제 지바 쓰네타네)의 참진(参陣) ・ 거병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히로쓰네 자신의 주체적인 행동이었고, 그는 헤이케와의 관계를 끊고 그의 실력으로 요소 헤이시(両総平氏)의 족장으로써의 지위를 확립하였다.[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거병

지쇼 4년(1180년) 8월에 헤이케 타도를 위한 병사를 일으켰다. 9월의 이시바시 산 전투(石橋山の戦い)에서 패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아와 국(安房国)에서 재기를 도모하였는데, 히로쓰네는 스미다 강(隅田川)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요리토모 앞으로 2만 기라는 대병력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요리토모는 많은 병력을 거느린 히로쓰네가 자신에게 참전하겠다고 찾아온 것에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자신에게 늦게 참전했다고 꾸짖었고, 요리토모의 기량에 감동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4] 한편 가마쿠라 바쿠후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히로쓰네의 병력을 2만 기로 썼으나, 《엔쿄본 헤이케 이야기》(延慶本平家物語)에서는 1만 기, 《겐페이 투쟁록》(源平闘諍録)에서는 1천여 기로 되어 있다.[5]

그러나 일본의 역사학자 노구치 마코토(野口実)는 《아즈마카가미》의 히로쓰네에 관한 기술을 상세히 분석하여, 히로쓰네는 처음부터 요리토모편에 서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요리토모 거병 이전에 요리토모로부터의 사자에 대한 히로쓰네의 대답은 조속히 수락되었고, 다만 배편 문제로 8월 하순까지 참진하기는 무리였다.[6] 이 점에서 9월 19일 스미타 강에서의 요리토모 방문은 히로쓰네에 의한 헤이케측 세력 소탕을 의미하며[2] 요리토모 방문은 가즈사 내지 가즈사 고쿠후(国府)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2]고 하였다. 역사학자 고자 류이치(呉座勇一)도 히로쓰네가 처음부터 요리토모측에 있었기에 요리토모가 아무 일 없이 아와에서 가즈사를 거쳐 시모우사(下総)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며, 히로쓰네가 거느리고 있었다는 대군도 가즈사 국내에서 헤이케측 세력을 일소함으로써 동원이 가능했다고 하여, 노구치의 견해를 긍정한다.[7]

같은 해 11월 후지 강 전투(富士川の戦い)에서는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를 대장으로 하는 요리토모 추토군에 종사하고 있던 자신의 형 인토 쓰네시게를 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해서 보소 헤이시는 히로쓰네 아래 통일되게 된다.

후지 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는 상경을 목표로 하는 요리토모에게 히타치 겐지(常陸源氏)인 사타케 씨(佐竹氏)를 칠 것을 주장하였다. 히로쓰네는 그 사타케 씨와도 연척 관계에 있었고, 사타케 요시마사(佐竹義政) ・ 히데요시(秀義) 형제에게 회견을 신청하였는데, 히데요시는 "지금 당장 찾아 뵐 수는 없다"(すぐには参上できない)며 가나사 성(金砂城)에 틀어박혔다. 형인 요시마사는 회견 신청을 받아 들여 찾아왔는데, 히로쓰네는 "서로 게닌을 물리고 둘이서만 이야기하자"며 다리 한가운데로 요시마사를 불러낸 다음, 그 자리에서 방심한 요시마사를 죽여 버렸다. 이후 요리토모군은 가나사 성에 있던 히데요시까지 쳐서 패주시켰다. 가나사 성 전투(金砂城の戦い)이다.

《아즈마카가미》 지쇼 5년(1181년) 6월 19일조에는 요리토모 휘하에서 두드러지게 많은 병력을 지닌 히로쓰네는 무례하게 구는 일이 많았고, 요리토모에 대해서도 "공사 모두 3대를 내려왔으나 여직 그런 예는 행한 적 없다"(公私共に三代の間, いまだその礼を為さず)라며 말에서 내리지 않았고, 또한 다른 고케닌들에 대해서도 횡포를 부렸으며, 요리토모가 하사한 스이칸(水干)을 놓고 오카자키 요시자네(岡崎義実)와 서로 치고 받기까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즈마카가미》는 가마쿠라 바쿠후의 공식 역사서라고는 해도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불명이다.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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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쓰네가 쓴 원문(願文). 다마마에 신사(玉前神社)에 세워져 있는 전시물이다.

주에이(寿永) 원년(1182년) 요리토모와의 대립이 격화되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립이 격화된 것은 주에이 원년 이전부터였고 주에이 원년에 이르면 오히려 양자간 관계는 개선되었다는 지적도 있다.[8]

주에이 2년(1183年) 12월, 모반의 기도가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요리토모에게 의심을 받은 히로쓰네는 요리토모의 명으로 사무라이도코로쇼시(侍所所司) 가지와라노 가게토키(梶原景時)의해 가마쿠라의 고쇼 안에서 암살당했다. 가게토키와 한창 쌍륙(双六)을 하고 있던 와중에 가게토키가 슬며시 쌍륙판을 타넘나 싶더니 그대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히로쓰네의 목을 쳤다는 것이다(《구칸쇼》).[9] 히로쓰네의 적남 가즈사노 요시쓰네(上総能常)도 함께 피살되었고, 가즈사 씨는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영지를 몰수당하여 그 영지는 지바 씨(千葉氏)나 미우라 씨(三浦氏) 등에게 분배되었다. 주에이 3년(1184년) 정월 , 히로쓰네의 갑옷에서 그가 쓴 원문(願文)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모반을 기도하는 문장은 없었고 오히려 요리토모의 무운(武運)을 비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에, 요리토모는 히로쓰네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그 자리에서 히로쓰네의 종형제 지바 쓰네타네가 맡아 거느리고 있던 가즈사 일족을 사면했다고 한다. 이 원문 발견의 일화도 히로쓰네의 거칠고 난폭한 모습을 전하는 일화와 마찬가지로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야 편찬된 《아즈마카가미》에서밖에 보이지 않아 신빙성은 알 수 없다. 히로쓰네 사후 지바 씨가 보소 헤이시의 당주를 이었다.

요리토모에게 선지(宣旨)가 내려져 도고쿠 행정권이 국가적으로 공인되기에 이른 시점에서, 원래 요리토모에게 있어 최대의 무력 기반이었던 히로쓰네가 오히려 그의 권력 확립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 모살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10][11] 요리토모 정권 내부에서는 도고쿠 독립론(東国独立論)을 주장하는 히로쓰네 등 유력 간토 무사층과,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조정과의 협조 노선을 중시하는 친교토파의 모순이 잠재하고 있었고, 전자는 모치히토 왕의 영지(以仁王の令旨)를 도고쿠 국가의 근거로 삼았고, 후자는 조정과의 연계 혹은 조정 산하에 들어감으로써 도고쿠 정권의 형성을 도모하는 입장이었다. 요리토모에게 도고쿠 행정권을 국가적으로 공인한 법적 근거로 여겨지는, 고시라카와인의 이른바 '주에이 2년 10월 선지'(寿永二年十月宣旨)로 요리토모 정권은 조정에 대한 협조 노선의 강도를 높이고, 선지가 나온 직후에 도고쿠 독립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던[주 1] 히로쓰네가 암살된 것은 요리토모 정권의 노선 확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12] 또한 히로쓰네는 왕자 모치히토 왕의 영지와 함께 왕자의 어린 아들인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를 옹립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반(反)중앙', '반조정'까지야 아니었겠지만, 똑같이 호쿠리쿠노미야를 옹립하고 있던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에게 접근했던 것이 요리토모의 경계심을 초래했고,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관계가 파탄남과 동시에 '친요시나카파'로 여겨진 히로쓰네가 암살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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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쓰네 저택 터

요약
관점

가즈사노 히로쓰네의 저택 터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까지도 확실하지 않으나, 1990년대에 지바 현(千葉県) 이즈미 군(夷隅郡) 오하라 정(大原町), 지금의 이즈미 시(いすみ市)나 온주쿠 정(御宿町) 일대에서 중세 조칸(城館) 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검토가 진행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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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도노다이(布施の殿台). 가즈사노 히로쓰네의 저택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다.

「보소시료」(房総志料)는 후세 촌(布施村), 현대 이즈미 시(いすみ市) 시타후세(下布施) ・ 가미후세(上布施), 온주쿠 정 가미후세(上布施)를 아우르는 지역에 히로쓰네의 저택이 있었다는 설을 제창하였다. 마을 안에는 산을 등진 '도노다이'(殿台)라 불리는 평탄한 지대가 있고, 이곳이 히로쓰네의 저택 터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일찍이 마을 안을 흐르는 강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를 찾아 보니 거대한 가 나타나 다가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겁에 질려 도망쳐 버렸다는 전승이 있으며, 그 게는 히로쓰네의 혼령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전설총서 가즈사」(日本伝説叢書 上総の巻)에도 《아즈마카가미》의 내용을 생각하여, 아와 국(安房の国) 도조(東條)의 여관(旅館)에서 히로쓰네의 관으로 보낸 사자가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고, 이는 후세 촌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다만 마을 주민들의 전승을 가즈사노 가게키요(上総景清)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으며, 마을 안에 실제로는 없을 수밖에 없는 요리토모의 경과지라 전하는 곳도 있는 등, 혼란이 보이고 있다.

「지바 대계도」(千葉大系図)에서는 이치노미야 야나기사와 성(一宮柳沢城)에 히로쓰네의 저택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이치노미야 정(一宮町)에서는 이를 마을 내의 다카후지 산성(高藤山城)이라고 지목하고, 성 안에 이치노미야 번주(一宮藩主) ・ 가노 히사아키라(加納久徴)가 히로쓰네의 공적을 기려 세운 석비가 있다. 한편 '야나기사와'(柳沢)를 이치노미야에 가까운 '오오야나기'(大柳)의 오기로 보아, 무쓰자와 정(睦沢町)의 오오야나기 관(大柳館)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밖에 일본 지바 현(千葉県) 도가네 시(東金市) 마쓰노고(松之郷)의 '신야마(新山)'와 '시로자카'(城坂)에 걸쳐 있는 설상대지(舌状台地)에 신야마 성(新山城) 터가 있고, 이곳에 히로쓰네의 저택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다. 인근 미야노타니(宮ノ谷)에 히로쓰네의 가신의 먼 후손이라 칭하는 집안이 있는 것 외에도 오카야(岡谷)에는 히로쓰네가 가신의 칼을 단련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제철공방 터 전승도 남아 있다.[15]

가마쿠라에 있었던 히로쓰네의 집터는 아사이나 기리도오리(朝比奈の切り通) 부근에 있었고, 인근에는 다치아라이노미즈(大刀洗の水)나 가즈사노스케 탑(上総介塔, 일본어 구자체: 上總介塔) 등 관련 사적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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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일본의 역사학자인 교토 여자대학(京都女子大学) 명예교수 노구치 마코토(野口実)는 가즈사노 히로쓰네에 대해 "약간은 허풍이 심하고 큰소리를 잘 치는데 본성은 소심하고 다정한 성격"(いささか大風呂敷で露骨な大言壮語を吐くが, 根は気の小さい, やさしい性格)이라고 평가하였다.[2]

갤러리

관련 작품

NHK 대하드라마

각주

참고 문헌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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