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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덕
한국의 독립운동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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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덕(康基德, 1886년 5월 4일 ~ ?)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춘곡(春谷), 호는 덕재(德齋). 본관은 신천 강씨
독립유공자 강규진(康奎鎭)^^(1905.10.28~1942.03.26)^^은 그의 5촌 당질(堂姪)이다.
생애
함경남도 원산 적전면 당상리 출생이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당시 그는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재학 중이었으며, 박희도, 이갑성을 통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된 뒤 학생 단체들과 모의하여 탑골공원 시위를 조직했다.
3·1 운동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당초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갑자기 바꾸어 태화관에 모여 있자 학생 대표로 태화관에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들이 체포된 뒤에도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다가 3월 5일 서울역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이후에도 1927년 함남기자연맹이 기자대회를 주최하려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시위가 발생한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1930년대에는 신간회 회원으로서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학관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함경남도 덕원군 청년회 위원장(회장)을 거쳐 제2대 함경남도 중앙도민회장(1948~49)으로 지냈으며, 동북동지회 최고위원에 취임하기도 했다.
1949년 2월 8일 이북5도위원회 초대 함경남도지사를 임명받아 15일부터 정식 취임했다. 그로부터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시기 입북한 것이 확인되었다. 1956년 6월까지 교화소 분소에서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될 때 가담했으나, 이후 함경북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 외에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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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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