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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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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군(鉅鹿郡)은 중국의 옛 행정 구역이다. 군국제 시행 시의 왕국령으로서는 거록국(鉅鹿國)이라 한다. 대략 지금의 싱타이시 중부 일대를 관할했고, 광평을 아우른 후한에서는 한단시의 북부 일부분도 관할했다. 행정 중심지는 거록현(지금의 싱타이시 핑샹현 서남), 영도현(지금의 싱타이시 닝진현 서남)이다. 거록군·거록현의 이름을 물려받은 현재의 쥐루 현은 옛 거록군의 남련현에 해당한다.
진
진나라에서 조나라 땅을 빼앗아 설치했다. 설치 시기는 역도원에 따르면 조나라가 완전히 망한 시황제 25년(기원전 222년)[1]이고 양수경에 따르면 진나라가 조나라의 동양(東陽) 일대를 취하고 조 유류왕을 항복시킨 시황제 19년(기원전 228년)인데, 《전국사》에서는 역도원의 설을 지지했고,[2] 《진대정구지리》에서는 군 설치에 대해선 양수경의 설을 지지했으나[3] 속현 목록에 이르러서는 기원전 222년을 설치 연도로 적어 일관되지 못하다.[4] 이름은 거록택(鉅鹿澤)에서 유래했다.[2][4] 군 치소는 거록현(지금의 싱타이시 핑샹현 서남)이다.[2] 문헌과 출토자료에서 확인되는 현은 다음과 같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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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요약
관점
전한 무제가 13주를 두면서 기주에 속했다.[6] 평제 시기에 시행된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15만 5951호, 인구 82만 7177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 지간(기원전 8년)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20현(12현 8후국)을 두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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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또 동관기(東觀記)에서는 왕망이 거록군을 나누어 화융(和戎)군[10]을 설치하고, 치소는 하곡양현에 뒀다고 한다.[9][11]
후한
37년에 폐지된 광평국을 병합하여[12] 15현을 두었고, 10만 9517호, 60만 2906명을 다스렸다.[13] 영평 3년(57년)에 후한 명제의 아들 유선을 광평왕으로 봉하면서 다시 광평국이 떨어져 나갔고, 15년(69년)에 후한 명제의 아들 유공을 거록왕으로 봉하면서 왕국이 되었고,[14] 건초 4년(79년)에 유공이 강릉왕으로 옮겨지면서 군이 되었다. 7년(82년)에는 광평왕 유선이 강릉왕으로 옮겨지면서 폐지된 광평국을 다시 병합했다.[15] 영원 5년 정월 신묘일, 광종현이 광종국이 되어, 화제의 아우 유만세가 왕으로 봉해졌고, 9월 신유일에 아들 없이 죽으면서 광종국은 폐해지고 거록군에 흡수되었다.[16] 연희 8년(165년), 영도현이 영도국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봉국 발해국을 상실한 발해왕 유회의 식읍이 되었다. 영강 원년(167년), 유회가 다시 발해왕이 되면서 영도국은 다시 거록군에 흡수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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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서진
213년(건안 13년),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후 원상, 원담의 난을 틈타 하북을 점령한 조조가 위군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거록군 광평현, 남화현, 임현, 곡주현, 열인현, 광년현, 척장현이 위군으로 이관되었다. 서진건국이후 평향현, 하곡양현, 교현이 한단군으로 이관되어 2현 10,040호만을 거느리는 작은 군이 되었다.
북위
3현 27,172호 130,239명을 거느렸으며 진정국, 상산군, 박릉군, 북평군과 함께 정주(定州)에 소속되었다.
수
양국군으로 개명되면서 사라졌다.
태수
전한
현한
후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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