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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마을
광주광역시 월곡동에 위치한 고려인 거주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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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마을은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에 위치한 고려인 거주지이다.[1] 땟골마을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큰 고려인 공동체 중 하나이다.[2] 2022년 기준 약 7,000명의 고려인 주민이 살고 있다.
현대에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지역 전체에 키릴 문자로 쓰인 간판이 있다.[3] 2024년 기준으로 고려인이 운영하는 약 100개의 식당 등 사업체가 있다.[4] 식당에서는 마르코프차와 같은 고려인 요리와 샤실리크, 플롭, 솜사와 같은 러시아 요리를 판매한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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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2022년 기준으로 고려인을 위한 약 40개의 시설이 있다.[3] 여기에는 종합지원센터(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6] 유치원, 대안학교, 의료센터, 라디오 방송국, 한국어 교육센터, 박물관 등이 포함된다.[3][6] 마을은 또한 두레 등 공동 농장을 운영하는데, 농장 부지는 새마을금고에서 무상으로 취득했다.[1]
독자적인 신문도 발행한다.[7] 2016년에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어 공동체 회관 3층에서 운영된다. 주간 프로그램 중 하나는 러시아 문학에 관한 것으로,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국립 대학교의 러시아 문학 전 교수였던 블라디미르 김이 진행한다.[3]
지방 정부와 주변 기업에서는 고려인마을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광주 일부 병원에서는 마을 고려인들에게 의료비 30% 할인을 제공한다.[1]
2010년대 초부터 이 지역에는 2024년까지 고려인이 운영하는 100개 이상의 사업체가 있는 거리가 생겼다. 이 거리는 "고려인마을 특화거리"로 불리며, 광주 시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거리에 있는 사업체 접근을 위한 추가 주차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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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이 공동체는 신조야라는 한 사람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여겨진다.[1][3][9]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3세대 고려인인 신조야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딸을 방문하기 위해 2001년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행 비자가 만료된 후 불법체류하다가,[3] 2003년 6월에 합법적인 거주 자격을 취득했다.[9] 한 인터뷰에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우즈베크어는 하지 못해서 그곳에서 살 때 어려움을 겪었다.[3]
신조야는 2002년에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몇 년간 공장에서 일했다. 이때 이 지역의 많은 고려인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이주 노동자 지원 센터를 열었다. 공동체는 약 20명으로 시작하여 친구와 친척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성장했다. 2013년까지 이 지역에는 수천 명의 고려인이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주시는 고려인 주민들을 돕기 위한 법적 틀을 마련했다.[3] 2014년 4월에 법적으로 인정받는 법인이 되었다.[9] 신조야는 2015년에 비자 문제 지원, 노동자 권리 옹호, 번역 등을 제공하는 자선 단체를 공동체를 위해 설립했다.[3]

이 지역은 이후 관광 명소가 되었다. 광주시와 협력하여 방문객을 유치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이루어졌다. 시는 2017년을 "고려인마을 방문의 해"로 지정했다.[6]
1세대 주민들은 대한민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주로 저임금 육체노동 분야에서 일하며, 직장 차별을 받는다.[3] 많은 이들이 공동 농장에서 일하거나 시골 마을의 집을 수리하는 일을 한다.[1] 언어도 장벽이 된다. 많은 이들이 한국어를 할 줄 모르고, 고려말 방언은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외국인으로 식별되기도 한다.[10]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14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공동체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주민들의 격려와 재정적 지원으로 수백 명의 난민,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공동체에 도착했다. 2022년 12월까지 주민들이 875명의 난민 도착을 지원했다고 보고되었다.[11][1] 약 600명이 마을로 왔다.[1]
2022년 8월, 이 지역에 우크라이나 고려인을 위한 센터가 문을 열었다. 공동체 주민들과 다른 한국인 기부자들이 한국계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지역에 도착하여 정착하는 데 상당한 돈을 기부했다.[12] 그들은 건물을 개조하여 난민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했다.[12] 쉼터는 다른 난민들을 위해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입주자들이 첫 급여를 받는 즉시 퇴거해야 한다는 규칙을 유지했다.[13] 민권 변호사와 구호 단체 직원들이 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다.[13] 2022년 8월, 400명의 전 쉼터 거주자들이 장기적으로 공동체로 이주했다고 보고되었다.[12]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학생들이 유입되자, 2016년경 겨우 두 학급의 학생들만 있던 지역학교에 2023년까지 8개 학급이 더 개설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4]
2022년경, 마을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약 7,0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15] 2023년 2월, 자금 부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고 보고되었다.[1] 많은 한국계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의 고향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장기적으로 머물기를 희망한다고 한다.[1][10]
2024년 2월, 초기 난민 중 약 30명이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으며, 남아있는 대다수는 한국에 장기 체류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초기 난민 중 약 400명은 일자리를 찾아 광주 도시권과 전남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고, 약 450명은 광주에 남아있었다. 이 난민들이 우크라이나 상황이 안정된 후에도 한국에 머무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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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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