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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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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고제가 파군과 촉군의 일부를 분할해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세웠다.[1]
익주에 속하였으며,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167,499호, 인구 662,249명이었다. 공관(工官)을 두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2] 원연·수화 연간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13현(10현 3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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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이름을 취도(就都)로 고치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11현 139,865호 509,438명이 살았다.[6][7]
촉한
유선이 촉한을 통치하던 연희연간에 동부 4개현이 동광한군으로 분리되면서 군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광한군에 잔류했던 속현중 하나인 면죽현은 성도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역할을 했다.
서진
263년 조위가 촉한을 멸망시킨뒤 익주 동부지역에 양주를 신설했는데, 이때 양주로 소속이 옮겨졌다. 266년(태시 2년)부터 285년(태강 6년)동안 4현이 신도군으로 분리되었다. 3현 5,100호를 거느렸다.[8]
북조
298년 진주에서 저족의 추장 이특이 촉군지역으로 남하했고, 304년그의 아들인 이류와 이웅이 성도와 파촉분지를 장악하면서 성한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347년성한이 동진의 환온에 의해 멸망하면서 일시적으로 동진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나 전진이 파촉을 점령하면서 전진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전진이 비수대전에서의 참패로 몰락한 틈을 타 송나라를 세운 유유가 일으킨 북벌중에 동진의 땅으로 들어왔다. 유유시기 수복된 광한군은 신도군 익주로 이관되었다.
남조
광한현과 덕양현이 수녕군으로, 면죽현이 남음평군으로 이관되었다. 6현 4,586호 27,149명을 거느렸다. 이때 개편된 것이 수나라가 개황초에 촉군으로 통폐합할때까지 유지되었다.[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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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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