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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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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펠투이눔 서기 7년경 – 67년)는 로마 시대의 저명한 장군으로,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매형이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장인이기도 하다.[1] 네로는 코르불로의 명성을 크게 두려워 하여, 그에게 자결을 하도록 명했고, 코르불로는"나는 정당하다"라는 뜻의 ‘악시오스'(Axios)라는 말을 외치며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스스로의 칼에 생을 마감했다.
선조
코르불로는 이탈리아반도에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그의 아버지는 티베리우스 시기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서 원로원에 입성했다. 그의 어머니 비스틸리아는 법무관을 지낸 가문 출신이었다.[2]
군 및 정치적 경력
요약
관점
칼리굴라 시기
코르불로의 생애 초기에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코르불로의 이복 자매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와의 혼인으로 매제가 된 칼리굴라의 집권 시기인 서기 39년에 보좌 집정관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칼리굴라의 암살 이후, 코르불로의 경력은 중단되어 있다가, 서기 47년에 신임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그를 '콜로니아'(쾰른)를 주둔지로 하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지역 병력의 지휘권자로 임명하였다.
이 새로운 직책은 어려운 임무였으며 코르불로는 게르만 부족들인 케루스키족과 카우키족 등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가 게르마니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라인강과 뫼즈강을 여녈하는 수로 건설 명령을 내렸다.[4] 코르불로 운하 또는 '포사 코르불로니스'라고 알려진, 이 토목 활동의 일부가 고고학 발굴 중에 발견되고 있으며 오늘날 레이던 (옛 마틸로)과 포르뷔르흐 (포룸 하드리아니)를 연결하는 현재의 플릿 운하와 거의 일치한 경로로 뻗어 있다.[5]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에 이르게 된, 코르불로는 라인과 북해를 순찬하는 육상 병력 및 해상 병력을 만들면서, 마침내 로마 속주에서 카우키족들을 축출해내고 자신의 군단의 최대 전투 효율을 보장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는 행군 중 야영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던 두 병사가 검을 벗어두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처형했다고 전해진다.[6] 코르불로는 "곡괭이로 적들을 격퇴한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동방 지역
코르불로는 로마로 복귀하여, 서기 52년까지 머물다가,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클라우디우스가 서기 52년에 사망한 뒤, 신임 황제 네로는 아르메니아 사태를 해결하도록 동방 속주에 그를 파견한다. 어느 정도 지연이 있었지만, 게르마니아에서 병력을 보충 받아, 서기 58년에 그는 공세를 갖춰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와 그의 형제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1세를 공격했다. 아르탁사타와 티그라노케르타 등이 그의 군단 (갈리카 제3군단, 페라타 제6군단, 프레텐시스 제10군단)에 함락되었으며, 로마로 와서 로마 정부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티그라네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시켰다.[8]
서기 61년에 티그라네스는 파르티아 왕국의 필수적 지역이던 아디아베네를 침공하였고,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대신에 볼로가세스는 협상에 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로마와 파르티아 양측 병력은 아르메니아에서 물러나고, 티그라네스는 왕위에서 물어나며, 티리다테스의 통치를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로마 정부는 이 협상안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고, 카파도키아 총독 루키우스 카센니우스 파이투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직접 통치 아래 두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9]
그 사이 코르불로는 시리아의 방위를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코르불로가 얻은 명성을 시기하던 유약하고 무능한 지휘관이던 파이투스는 서기 62년 란데이아에서 극심한 패배를 당하면서, 그는 그곳에서 파르티아인들에게 포위되어 굴복하며 아르메니아로 달아났다. 다시 한번 지휘권이 코르불로에게 맡겨졌다. 서기 63년에, 강력한 병력과 함께 그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 트리다테스는 전투를 벌이길 거부하고 평화 조약 체결에 나섰다. 란데이아에서 그는 황제의 조각상 발 밑 아래에 디아뎀을 벗어 내려두고,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손으로 다시 받기 전까지는 그것을 다시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9]
몰락과 죽음
네로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귀족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두 차례 시도가 실패하고, 그 중 하나에 코르불로의 사위이자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가 연루되자, 네로는 코르불로 및 그의 지원을 의심하게 되었다. 서기 67년에 유대에서 소란이 발생하자 네로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로마 병력의 지휘권을 맡으라 명령하고, 코르불로와 더불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의 총독으로 있던 그의 형제들을 그리스로 소환하였다. 코린토스의 일부였던 켄크레아이에 도착한 네로의 전령은 코르불로와 만나 그에게 자결을 하라 명하였다.[9] 이 명령에도 의연한, 그는 본인의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나는 합당하다"라는 의미[9]의 악시오스!'라 외치며 본인의 칼에 쓰러져 죽었다.[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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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코르불로는 아시아의 경험에 대해 기록물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9]
혼인과 자녀
코르불로는 서기 30년에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그의 아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고손녀 유니아 레피다[11] 사이에서 태어난 딸 카시아 롱기나와 혼인하였다. 카시아는 코르불로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으며 그 중 한 명은 원로원 의원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와 혼인했고, 나머지 하나인 도미티아 롱기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혼인했다.
대중 문화에서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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