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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일 (15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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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인물인 김만일(金萬鎰)은 임진왜란때 말 500여필, 광해군 때 말 500여필, 인조 때 다시 정묘호란이 터지자 240여필을 헌마하는 등, 1300여필 이상의 말을 헌납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헌마공신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1]

간략 정보 김만일金萬鎰, 출생 ...

김만일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22세손, 조선개국 일등공신 의정부좌찬성 익화군 충민공 김인찬의 8세손이며, 김인찬의 셋째 아들인 김검룡(입도시조)의 7세손으로, 제주 의귀리(현재의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에서 태어났다. 한라산 일대에서 말목장을 운영하였는데, 목축기술이 탁월하여 많은 수의 양마를 길러냈다.[1]

김만일이 길렀던 말이 1만여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데, 오랜 전란으로 국영목장이 황폐화되자 1618년 전마관 양시헌은 조정에 보고없이 김만일의 목장에서 말 1000여필을 차출하고 김만일과 세 아들에게 중형을 가했다. 이 소식을 보고 받은 광해군은 크게 노해 김만일 일가를 풀어주고 전마관 양시헌을 파직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후로도 관리들의 수탈이 이어지자 김만일은 준마의 보존이 어렵다면 차라리 나라에서 요긴하게 써달라며 광해군에게 말 500여필을 헌납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김만일을 종2품 오위도총부도총감과 중추부의 지충추부사에 임명하며 헌마공신 칭호를 내렸고, 1628년에 김만일은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다.[2]

김만일이 죽은 뒤에도 그 아들 김대길은 말 200여필을 헌납하여 초대 산마감목관으로 임명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제주 산마감목관 직을 세습하며 말을 키우도록 하였다. 이후 230여년에 걸쳐 2만여 필의 말을 조선 왕실에 공급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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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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