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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충

고려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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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충(金漢忠, 1043년1120년 10월 19일(음력 9월 25일)[1])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경주에서 분적하였다.

간략 정보 김한충金漢忠, 출생 ...

생애

김한충은 신라(新羅)의 대보(大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며, 고조부는 김유렴(金庾廉)으로 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2]

김한충은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웅장하였고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선종때에 여러 벼슬을 거쳐서 합문인진사가 되고 경거도위로 승진하였고, 안서도호부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였는데 정사를 너그럽게 처리하고 가혹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였다 한다.[2]

1087년(선종 4년)에 요나라에 밀진사로 보내졌으며,[3] 헌종 초년에 형부시랑에 임명되었다.[2] 그 후 1098년(숙종 3년)에 숙종이 태자를 책봉하고 김한충에게는 좌서자를 겸임시켰으며,[4] 1101년(숙종 6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으며,[5] 1103년(숙종 8년)에 예부상서가 되었다.[6] 송나라 사신들이 올때 김한충에게 바다에 들어가서 마중을 하라는 임무를 주자, 송나라 사신이 오던 도중 돌개바람을 만나 배가 거의 파선될 위기에 처하자 물에 빠진 송나라 사신들을 전원 구출하였다.[2]

그 뒤 성서좌복야 판비서성사에 임명됐다. 윤관이 여진족을 토벌할 때 김한충은 중군병마사로 출정하여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웠고, 행영병마사가 되었는데 윤관 등이 각 군사들에게 군령을 내려 내성에 재료로 쓸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새로 9개소에 성곽을 쌓게 하고 남부의 주민들을 그곳으로 이주해와 정착하게 했다. 그러나 김한충이 이 방안이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만일 외성의 축조가 완성되기 전에 갑자기 무슨 사변이 생기는 경우에 국내에 완전한 성이 없으면 백성들을 어떻게 보위하겠는가? 아무리 원수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나는 감히 복종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되었다고 한다.[2]

1106년(예종 원년)에 황룡사에서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했고,[7] 1110년(예종 5년)에 판공부사(判工部事)에 임명되었으며,[8] 1111년(예종 6년)에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임명되었으며,[9] 같은 해 12월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임명되었으며,[10] 1120년(예종 15년)에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작고 시 그의 유언에 따라 장례절차는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시호는 원평(元平)이다.[2]

아내가 문종과 비첩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므로, 높은 관직에는 올랐으나 대성(臺省)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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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고조부 : 김유렴(金庾廉)
  • 아버지 : 김행공(金行恭)
  • 어머니 : ?
    • 부인: 고려 문종 비첩의 딸
      • 아들: 김경초(金景初)
      • 아들: 김경원(金景元)
      • 아들: 김경약(金景若)
      • 장녀 : ?
      • 차녀 : 수주 최씨(水州 崔氏) 최정(崔精)에게 출가[11] - 최사위(崔士威) 증손

같이 보기

  • 손변: 아내의 가계가 왕실의 서족(庶族)이었기 때문에 임명되지 못함.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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