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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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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약칭 NYT)는 뉴욕에 본사를 둔 미국의 일간 신문으로, 국내외 뉴스, 사설·칼럼, 탐사보도, 서평과 문화 비평을 폭넓게 다룬다. 언론계에서는 흔히 미국의 ‘기록지’(newspaper of record)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1] 신문은 뉴욕 타임스 컴퍼니가 발행하며, 1896년 이후 옥스–설즈버거(Ochs–Sulzberger) 가문이 경영을 이어오고 있고 현 출판인은 A. G. 설즈버거이다.[2] 본사는 맨해튼의 뉴욕 타임스 빌딩에 있다. 2024년 2월 회사 실적 공시 기준으로 디지털 전용 유료 구독은 약 970만, 인쇄 구독은 약 66만 수준으로 집계되며(인쇄 발행 부수 기준 국내 상위권),[3] 퓰리처상은 2023년 기준 137회 이상 수상했다.[4] 공식 도메인은 nytimes.com이다.
뉴욕 타임스는 21세기 들어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해 유료 구독 기반을 확대했고, 지면과 온라인을 통합한 뉴스룸 운영, 데이터 시각화, 팟캐스트(The Daily), The New York Times Magazine·Book Review·국제판(The New York Times International Edition) 등 브랜드 확장을 병행했다.[1] 또한 The New York Times Games, 1996년 nytimes.com 개설, 2022년 스포츠 매체 The Athletic 인수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진행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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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1851–1896
신문은 1851년 헨리 자비스 레이먼드와 조지 존스가 뉴욕 데일리 타임스(New-York Daily Times)라는 제호로 창간했다.[7][8] 초창기에는 정파색을 줄이고 사실 중심 보도를 지향해 상공인과 중산층 독자층을 넓혔으며,[8] 미국 남북전쟁 시기에는 남부 현지 특파망을 통해 전황을 직접 취재했다.[7] 이후 전신·철도망을 활용한 신속 보도와 교차 검증 관행으로 경쟁 지면과 차별화했고, 가십·선정주의 대신 의회·법원·금융 동향을 자세히 전하는 편집 철학을 확립했다.
레이먼드 사후 존스 체제의 타임스는 태머니 홀과 보스 윌리엄 M. 트위드의 부패를 폭로하는 연속 보도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1871년에는 태머니의 회계 장부 일부를 공개해 여론을 움직였고, 트위드는 1873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9] 1890년대 초 경영난 속에 편집진이 법인을 꾸려 신문을 지탱했으나, 1893년 공황으로 재정 압박이 커졌다.[10] 이 시기 타임스는 ‘사실·균형·절제’ 기조를 유지하며 일요판과 문예 비평을 강화해 충성 독자를 축적했고 지역·전국 광고 포트폴리오의 균형으로 재무 기반을 다졌다.
1896–1945
1896년 아돌프 옥스가 The New-York Times를 인수해 대대적 체질 개선에 나섰고 제호의 하이픈을 제거해 오늘의 이름으로 바꾸었다.[11] 1905년에는 타임스 타워(현 타임스 스퀘어)로 사옥을 옮겼다.[12] 편집 책임자 카 밴 안다의 지휘 아래 타이타닉 침몰 특종,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소개, 투탕카멘 무덤 발굴 보도 등 과학·국제 뉴스에 강점을 보였고,[13] 1910년대 공화당 내 분열 등 정치 재편 국면을 폭넓게 다뤘다.[14] 옥스는 모토 ‘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를 내걸고 Book Review를 정례화했으며, 로토그라뷰어 사진·일요 매거진·교차퍼즐(1942) 등 제품 혁신을 병행했다. 옥스 사후 사위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가 1935년 출판인이 되었고 대공황기 긴축과 함께 사업 다각화를 추진해 1944년 WQXR-FM을 인수했다.[1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고슬라비아 쿠데타 등 단독을 포함한 대형 헤드라인과 해외 특파망으로 광범위한 전쟁 보도를 전개했으며,[16] 윌리엄 L. 로런스는 맨해튼 계획 취재로 원자폭탄 개발 과정을 기록했다.[17] 전시에는 군 교환서비스 등을 통해 해외 배포망을 확대했고 전후 핵 시대 개막을 전하는 기사로 주목을 받았다.
1945–1998
전후 신문은 전국지로서의 위상을 강화했고,[18] 인쇄 자동화 도입과 노사 갈등, 텔레비전·교외지 경쟁 등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했다.[19] 냉전기에는 상원 내부 보안 소위원회(매카시즘)의 조사 대상이 되기도 했고, 제5수정조항을 근거로 한 내부 인사 조치가 논란을 낳았다. 1960년 전면광고 “Heed Their Rising Voices” 게재를 둘러싼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1964년 뉴욕 타임스 대 설리번(New York Times Co. v. Sullivan) 판결로 공직자 명예훼손 소송의 기준을 엄격히 하여 언론 자유를 확대했다. 1962–63년 신문 파업은 뉴욕의 미디어 소비 지형을 흔들었고 서부판(로스앤젤레스 인쇄) 시도, 인쇄 자동화 확산과 맞물려 산업 구조 변화를 촉발했다.[20] 1971년 국방부의 베트남전 기밀 문건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둘러싸고 정부의 사전금지 요구에 맞섰고, 연방대법원은 1971년 뉴욕 타임스 대 미국(New York Times Co. v. United States)에서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신문사의 손을 들어 주었다.[21] 워터게이트 사건 초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의회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취재를 확대했다.[22] 1978년 파업을 거쳐 1980년대에는 위성 전송·외곽 인쇄플랜트·색면 인쇄·섹션 브랜딩 강화로 전국 독자층을 확장했다.
1990년대에는 온라인 전환을 준비해 1994년 AOL 내 확장판을 시험하고 1996년 nytimes.com을 공식 개설했다.[5] 1995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와 함께 유나바머 선언문 게재 결정을 지지해 범인 검거에 기여했다.[23] 2003년 제이슨 블레어 사건으로 표절·허위 보도가 드러나자 내부 쇄신을 단행했다.[24] 국제판은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지분을 통해 운영을 이어가다 이후 국제판 브랜드를 The New York Times International Edition으로 통합했다.
1998년~현재
닷컴 버블 붕괴와 9·11 테러·탄저균 사건 보도 등 격변기를 거치며 디지털 역량을 키웠고,[1] 2002년 이라크의 알루미늄 튜브 관련 보도가 전쟁 담론에 영향을 미치자 취재·검증 관행을 재점검했다.[1] 2005년 국가안보국의 영장 없는 감시 프로그램을 폭로하는 등 권력 감시 보도를 이어갔다.[1] 2008년 금융위기 후 경영 합리화와 유료 구독 모델 검토가 본격화되어 2011년 페이월을 도입했다.[1] 2014년에는 편집 책임자 교체로 조직 문화와 전략을 둘러싼 논의가 촉발되었다.[25]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 이메일 논란을 집중 보도했고 그 비중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렸다.[26] 2017년 조디 캔터·메건 투이가 하비 와인스틴 의혹을 추적 보도해 미투 운동의 기폭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1] 같은 해 복사 데스크 축소 등 조직 재편이 있었다. 2019년에는 연방기관에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 구독 취소를 지시한 백악관 방침이 알려졌다.[27] 2020년 5월 23일자 1면은 “미국 내 코로나19 사망자 10만 명에 가까운 이름들—계산할 수 없는 상실”이라는 머리글 아래 희생자 이름과 약력을 지면 전체에 배열해 화제가 됐다.[28] 2020년대 들어서는 Wordle 편입, Cooking·Wirecutter·오디오·라이브 블로그·비주얼 인베스티게이션 강화, The Athletic 인수(2022년) 등 제품·형식 혁신과 포트폴리오 확장을 지속했다.[6][1] 2024년에는 일부 매체가 백악관 취재와 대통령 인터뷰 거부 문제 등을 놓고 뉴욕 타임스의 보도 태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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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저명성과 보도 특징
뉴욕 타임스는 지면 발행 부수에서 USA 투데이·월 스트리트 저널보다 적은 시기도 있었으나, 탐사보도·국제 뉴스·문화 비평·서평·데이터 저널리즘에서 높은 영향력을 유지한다. 논설위원실과 뉴스룸의 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팩트체크·교열을 담당하는 스탠더즈 데스크, 정정·반론 절차, 스타일북을 통해 ‘타임스식 문체’와 검증 규범을 표준화했다. 주요 연설문·정책 문서의 전문을 상세히 게재하는 관행, 시청각·오픈소스 분석을 결합한 비주얼 인베스티게이션, 실시간 라이브 업데이트, 주제별 뉴스레터·오디오·게임과의 교차 독서 유도 등 형식 다변화로 독자 참여를 높이고 있으며, 편집 방침·표현의 균형·플랫폼 의존도 같은 쟁점에 대해 내부 토론과 독자 설명을 병행하는 ‘설명 책임’ 전략을 취한다.[1]
퓰리처상
뉴욕 타임스는 20세기 초부터 다수의 퓰리처상을 누적해 왔으며, 펜타곤 페이퍼 보도(1971)는 정부의 사전금지에 맞서 언론의 자유 원칙을 확인한 사례로 남았다.[30] 이후 공공 서비스·탐사·국제 보도·특집·해설·사진·그래픽 등 여러 부문에서 수상 실적을 이어 왔고, 대규모 협업과 데이터·문서 분석, 현장 취재와 포렌식 영상 분석을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상시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1]
지국
신문사는 뉴욕주 내 다수의 부서와 미국 전역의 국내 지국, 유럽·중동·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해외 지국을 운영하며 장기 상주 특파와 프로젝트형 탐사팀을 병행한다. 과거 자료에 따르면 뉴욕주 16개 부서, 11개 국내 지국, 26개 해외 지국을 운영했으며(2010년대 중반 기준),[7][8] 2014년 10월 28일 기준 인쇄 발행 부수는 평일 약 64만, 일요판 약 118만으로 집계됐다.[31] 디지털 시대에는 프리랜서·스트링거·OSINT 네트워크를 유연하게 활용해 분쟁·재난 지역 접근성과 안전성을 개선하고 데이터·그래픽·포토·오디오 조직을 글로벌하게 배치해 속보와 해설의 균형을 도모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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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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