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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무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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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무네모리(일본어: 平宗盛, 1147년 ~ 1185년 7월 19일)는 헤이안 시대 말기 헤이케 일문의 무장, 공경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3남. 모친은 도키코(기요모리의 계실)이다. 안토쿠 천황의 친외숙(동복동생은 안토쿠 천황의 모후 겐레이몬인)이다. 통칭은 야시마대신(屋島大臣). 부친 기요모리의 후계자였으며, 겐페이 전쟁 동안 헤이케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였던 부친과는 달리, 무네모리는 중세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사 가문 중 하나를 완전히 파괴하는 데 기여한 무능한 군사 전략가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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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과 계승
무네모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지배적인 군사 인물인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는 그의 형 시게모리가 부친의 후계자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시게모리는 1179년에 사망하였고 이미 1162년에 둘째 형 모토모리가 사망하였기에 무네모리가 지정 상속인이 되었다. 1181년에 기요모리가 사망하자 그는 모든 가문의 문제를 자신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이러한 전환은 가문 역사상 최악의 시기에 일어났으며, 이는 헤이케와 겐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겐페이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이루어졌다.
군사 리더십과 실패
헤이케는 여전히 수도 교토를 지배하고 상당한 군사 자원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무능함은 곧 분명해졌다. 그의 초기 작전은 부실한 물류와 계획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183년 조카 고레모리(維盛, 이복형 시게모리의 장남) 휘하에 군대를 파견하여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와 대결했을 때, 헤이케 군대는 식량이 너무 부족하여 군인들이 에치젠에 도달하려고 할 때 "까마귀 떼"처럼 시골을 약탈했다. 이러한 잔인한 행동은 지역 주민들을 소외시켰고 헤이케의 절박함을 보여주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183년 6월 구리카라고개 전투(倶利伽羅峠の戦い)에서 나타났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헤이케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뛰어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참혹한 패배 이후 무네모리의 자신감은 무너졌다. 그는 히에이산의 승병(僧兵)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겐지 군대가 교토에 빠르게 접근하자 무네모리는 수도를 포기하고 어린 안토쿠 천황, 황실 구성원등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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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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