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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

옛 북원의 동쪽 지역 또는 보르지긴이 다스렸던 북원 지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동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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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중국어: 东蒙古), 달단(중국어: 鞑靼) 또는 타타르(영어: Tatar)는 역사적으로 북원의 동쪽 지역, 또는 보르지긴이 다스린 북원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368년 몽골 제국고비 사막 이남을 상실한 이후 1388년 토구스테무르 칸이 명-오이라트 연합군에 암살당한 뒤 북원 정계가 혼란에 빠졌다. 이후 북원의 영토는 사실상 오이라트가 주도하는 서몽골과 보르지긴이 지배하는 동몽골로 나뉘어졌고, 오이라트족과 보르지긴은 몽골 초원의 지배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갈등했다. 1409년부터 1424년까지 명나라 영락제와의 전쟁으로 힘을 잃은 보르지긴은 오이라트 수령이었던 토곤의 공격을 받았고 동몽골은 1434년 오이라트에 병합되었다.[1]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던 동몽골의 보르지긴은 1449년 토목의 변 이후 칸을 자처한 에센 타이시가 1453년 살해당하면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2] 1487년 다얀 칸은 동몽골을 하나로 통합한 뒤 주변 지역을 공격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다얀 칸의 손자였던 알탄 칸이 그의 뒤를 이어 동몽골의 중흥을 이룩했다.[3] 1593년 누르하치여진을 통일하자 동몽골은 누르하치를 공격했으나 패배했고, 1603년 할하 몽골인의 항복과 1632년 링단 칸의 패배로 동몽골은 후금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그러나 동몽골을 다스리던 보르기진은 1911년 청나라멸망할 때까지 만주족과 왕실 혼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몽골의 지배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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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몽골과 동몽골을 보여주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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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동몽골이라는 명칭은 역사학자들의 용어로, 당대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는 북원이었다. 명나라는 동몽골 지역을 '달단'(鞑靼)이라고 불렀지만,[4] 달단이라 불린 몽골족들은 스스로를 '40만호 몽골' 또는 '도이친 몽골'이라고 불렀다.[5][6] 또한 다얀 칸이 동몽골을 통일한 이후 동몽골 일대를 3개의 투멘으로 분리했는데 이 중 가장 큰 투멘이었던 "할하부"의 이름을 따서 할하라고 부르기도 했다.[7]

역사

요약
관점

명과 북원의 초기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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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영락제의 몽골 원정 지도.

1368년 1월 23일 원나라에게서 상당한 영토를 빼앗은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1368년 9월 홍무제는 원의 수도였던 대도를 점령했고,[8] 1370년에는 몽골족을 추격해 대도 이북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9] 이후 북원과 홍무제의 대치는 지속되었지만 1372년 홍무제가 파견한 명군 150,000명이 몽골군과의 전투를 벌였고 이 중 100,000명이 궤멸하면서 양측의 전쟁은 소강 상태가 되었다.[10] 일련의 내정 개혁을 마친 뒤 1381년부터 홍무제는 북원과의 전쟁을 재개해 만리장성 일대에서 북원과 충돌했다.[11][12] 이 충돌은 명 남해안의 왜구 문제로 1387년까지 중단되었다가 1388년부터 재개되었다. 1388년 홍무제가 파견한 명군 200,000명은 북원군과 다시 맞붙었고 몽골군 73,000명이 포로로 잡히고 투구스 테무르가 도망치면서 전쟁은 명군의 승리로 끝났다.[12] 명나라는 이 전쟁을 통해 고비사막 일대와 요동 지방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13] 몽골은 막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1389년 투구스 테무르는 오이라트의 지원을 받은 예수데르에게 암살되면서 원 황실 가문이었던 보르기진의 대가 끊기고 말았다.[1] 이 전쟁으로 예수데르가 칸에 자리에 올랐고 그를 지지하던 오이라트가 북원의 지배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4] 이후 북원은 사실상 서몽골과 동몽골, 그리고 우량카이로 분열되었고, 동몽골을 지배하던 칸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매우 축소되었다.[15] 1390년 몽골 동남부에 있던 우량카이는 명나라에 복속하고 화친을 맹세했다.[16]

동몽골은 1392년 예수데르의 사망 이후 일련의 내분을 거쳤다. 1403년 정난의 변으로 황위에 오른 영락제는 동몽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1409년 100,000명의 군대를 동몽골에 파견했으나 동몽골군은 명군을 격파했다. 또한 1408년 명의 책봉을 받아들인 오이라트와 달리 동몽골 지도부는 명의 사신을 살해하고 명나라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했다.[17] 동몽골의 적대 정책에 맞서 영락제는 동몽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직접 1410년부터 1424년까지 친정을 단행했다.[18] 1424년 영락제는 마지막 몽골 친정을 했지만 이 원정은 지난 원정들과 달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영락제는 명나라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19] 마지막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몽골 지도부는 영락제의 친정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2] 영락제가 의도한대로 몽골 전체 세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20]

오이라트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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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센 타이시 시기의 오이라트.

1399년 북원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오이라트 연맹을 세운 오이라트인들은 영락제의 몽골 원정 당시 명과 협력하여 동몽골을 공격하기도 하고, 영락제로부터 수령이 왕작을 받기도 했다.[2] 1424년 영락제가 원정을 마친 이후, 오이라트 연맹은 토곤을 중심으로 부족을 통일하고 1433년 타이순 칸을 북원의 지도자로 내세웠다.[21] 1434년 동몽골의 지도자였던 아룩타이가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살해되면서 북원은 오이라트의 지배에 놓였다.[2] 이 시기 북원의 칸은 타이순 칸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북원에서 권력을 행사한 것은 타이순 칸의 즉위에 도움을 준 토곤과 오이라트 부족이었다.[22] 토곤의 뒤를 이어 아들 에센이 북원에서 권력을 행사했다.[23] 에센은 북원 주변 국가 및 민족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24] 북원은 이 시기 동쪽으로 조선과 국경을 접했고,[22] 서쪽으로는 모굴 칸국의 무역도시인 하미를 점령해 명과 중앙아시아의 교역을 차단했다.[23] 15세기 중엽 북원 정부는 교역을 통해 차, 비단, 그리고 사치품을 말로 교환하였고, 이 교역품은 에센이 부족들의 통합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25] 오이라트의 통일 이후 북원을 위협으로 인식하던 명나라 조정은 북원과의 교역을 제한하고 그 규모를 축소하고자 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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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토목의 변 당시 몽골군, 명군의 이동.

1449년 명과 북원의 무역이 끊기고 에센이 명 황실로부터 통혼에 대한 거부를 듣자 에센이 이끄는 오이라트군이 명을 침입했다.[25] 타이순 칸은 에센의 정벌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요동 지역으로 우량카이족을 배치해 에센의 전쟁을 지원했다. 20,000명의 오이라트군은 공격 방향을 셋으로 나누어 명군과 대치했다.[26] 당시 명나라가 북원보다 군사적으로 여러 면에서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27] 명나라는 지휘부의 실책으로 황제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28] 에센은 명 영종을 인질로 잡고 그를 돌려주는 대신 자유 무역을 요구했지만 명 황실은 영종의 동생을 황제로 삼고 협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1450년 아무런 성과 없이 영종을 풀어주고 몽골로 귀환했다.[29] 그러나 토목의 변에서 에센이 성과 없이 돌아온 것은 몽골 내에서 큰 비판을 받게 되었고, 에센의 권력도 약화되었다.[30] 2년 뒤인 1452년 타이순 칸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북원 일대에 다시 내분이 발생했고 2년 뒤인 1454년 타이순 칸의 막내동생인 아그바르진이 새로운 북원의 칸이 되었다.[31] 에센 타이시는 1454년 그를 암살하고 스스로 북원의 칸에 즉위했다. 그러나 이는 몽골인들이 정통적으로 칸을 추대하는 방식과 어긋난 것이었고 오이라트족은 반란을 일으켜 에센을 암살했다.[2] 에센의 암살 이후 오이라트는 동몽골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북원은 다시 반 세기 동안 분열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침체와 분열

1453년 에센 피살부터 1487년 바얀 뭉케의 피살까지 약 30년의 기간 동안 동몽골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1455년 에센 피살 이후 집권한 마르코르기스 오헤크트 칸 역시 1465년 집권층 간의 내란으로 인한 여파로 죽었다.[32] 그 뒤를 이은 토구스몽케도 집권 1년 만에 사망했고, 1466년부터 1475년까지 북원은 칸의 공위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 동몽골은 카리친부, 벨구테이계 몽골인, 오르도스부가 각자 칸을 내세우면서 정권을 잡고자 했다.[33] 만돌 칸이 1475년 이들을 모두 진압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34] 1479년 만돌 칸의 사망 이후 바얀 몽케가 1480년부터 동몽골을 이끌었지만, 1487년 바얀 뭉케는 반대파에 피살되었다.[35]

1449년 토목의 변 이후에도 몽골과 명의 충돌은 지속되었다. 명나라 성화제가 1464년 칙명을 통해 군 개혁을 명령했고, 이 명령은 세 개의 주둔군으로 나누어져 있던 북방 군대의 훈련을 하나로 통합하고 이들 중 우수한 병력 10,000명을 뽑아 12군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었다.[a] 1470년대부터 1480년대 중반까지 명군은 군제 개혁을 통해 몽골의 침입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36] 또한 성화제가 여진으로 정벌을 나서고 직접 행정기구를 설치해 이들을 통제하면서, 동몽골은 여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동몽골의 중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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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얀 칸 통치 시기의 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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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세워진 알탄 칸 동상.

만주족의 성장과 북원 멸망

북원 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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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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