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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바하두르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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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바하두르 샤(네팔어: रणबहादुर शाह, 1775년 5월 25일~1806년 4월 25일)는 네팔의 국왕으로, 아버지 프라탑 싱 샤의 사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 라젠드라 라자야 락슈미 데비 (1785년 7월 13일, 결핵으로 사망)와 이후 삼촌 바하두르 샤의 섭정 하에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 왕국은 정복을 통해 확장되어 현재 인도 일부인 가르왈과 쿠마온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삼촌 바하두르 샤를 감금하였고, 삼촌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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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프라탑 싱 샤 (1775년~1777년)의 조기 사망은 프리트비 나라얀 샤의 장남이 남긴 권력 공백으로, 수십 년간 채워지지 않아 신생 네팔 국가의 기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프라탑 싱 샤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 라나 바하두르 샤 (재위 1777년~1799년)로, 즉위 당시 나이는 겨우 두 살 반에 불과했다.[1] 1785년까지는 어머니 라젠드라 락슈미 여왕이 섭정을 맡았고, 이후 바하두르 샤 (재위 1785년~1794년, 프리트비 나라얀 샤의 둘째 아들)가 섭정을 이어받았다.[2] 궁정 생활은 국가 행정보다는 두 섭정과의 정치적 동맹을 중심으로 한 권력 경쟁으로 소비되었으며, 이는 이후 섭정 간 경쟁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1788년~1792년의 청-네팔 전쟁 당시 필요에 의해 바하두르 샤는 일시적으로 친영국 입장을 취해야 했고, 1792년 영국과 상업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3]
한편, 라나 바하두르 샤의 어린 시절은 풍요로운 사치 속에서 보냈다. 1794년 성년이 된 그는 첫 조치로 정부를 재편성하여 삼촌 바하두르 샤가 공식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4][5] 1795년 중반, 그는 마이틸리 브라만 과부 칸타바티 자에게 열정을 느껴 결혼하였으며, 당시 힌두법에 따라 이들의 사생아를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적법한 후계자를 배제하였다.[5][6] 1797년까지 삼촌과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삼촌은 은퇴 생활을 하면서 중국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라나 바하두르 샤는 삼촌을 감금 (1797년 2월 19일)하고 결국 살해 (1797년 6월 23일)하였다.[5][7] 이러한 행위는 궁정 내 신하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 특히 브라만 사이에서 라나 바하두르 샤의 악명을 높였다.
같은 해인 1797년, 기르반 유드다 비크람 샤가 태어나자 즉시 왕세자로 선포되었다.[8] 그러나 기르반 출생 1년 이내에 칸타바티가 결핵에 걸렸고, 의사들은 그녀가 금욕적 수행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칸타바티가 생존해 있는 동안 기르반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시 23세였던 라나 바하두르 샤는 1799년 3월 23일, 아들을 위해 왕위에서 물러나고, 첫 번째 왕비 라즈 라제슈와리를 섭정으로 임명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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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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