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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웃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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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 알딘 파들알라 하마다니 (1250년[1] ~ 1318년)(페르시아어: رشیدالدین فضل‌الله همدانی Rashīd al-Dīn Faḍl Allāh Abū al-Khayr Hamadān), 일명 라시드 알타비브 알하마다니(‘하마단 출신의 의사 라시드’라는 의미이다)[2][3]는 의사,[4] 박식가, 역사가이다. 역사가로서 그의 대표작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연대기의 집성》(Jami al-Tawarikh. 일명 《집사》[集史][5]) 으로, 몽골, 중국, 인도, 아랍, 투르크, 페르시아 등 여러 종족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이다.[2] 1980년, 삽화가 포함된 이 책의 아랍어 사본은 소더비즈에서 나세르 다비드 할릴에게 850,000 파운드의 가격으로 팔렸는데, 해당 언어로 쓰여진 책의 가격으로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6]

간략 정보 라시드 알딘 파들알라 하마다니رشیدالدین فضل‌الله همدانی, 출생 ...
간략 정보 라시드웃딘, 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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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가운데). 14세기 초 랏시드웃딘의 그림

그의 문화에 대한 지식은 몽골고원에서 중국, 페르시아, 아랍, 유럽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몽골시대 후기에는 존재했던 ‘원자료’들에서 보충된 것이다. 라시드 알딘의 필치는 당대의 경향과 다르게 간결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또한 그의 저작들은 동방과 서방의 지식·종교·문화의 교환을 활성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리스 로사비는 라시드 알딘을 “의심할 여지 없이 몽골지배기의 페르시아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라 평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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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라시드 앗 딘의 할아버지 무와팍크 앗 다울라와 아버지 이마드 앗 다울라, 삼촌 라이스 앗 다울라는 1256년 11에 알라무트암살단파 교주 루큰 앗 딘 후르샤가 훌레구에게 항복할 때 성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루큰 앗 딘 후르샤는 훌레구의 명령으로 대칸을 알현하러 몽골리아를 방문했다가 살해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 역시 가족들과 함께 알라무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8] 라시드 앗 딘 자신의 기술에 의하면 당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알라무트 성채 안에 연금되어 있었고 그곳에 함락될 때 이들은 저명한 학자였던 나시르 앗 딘 투시와 함께 산성에서 내려올 수 있었으며, 훌레구는 이들의 충성심을 확인한 뒤 은사를 내려 주고 일족과 추종자, 하인들을 모두 모아 궁정에서 일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의 가족이 유태인이라는 설이 있는데(후술), 이에 따르면 그는 30세 즈음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9]

라시드 알딘은 당시 유태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던 하마단에서 태어나 가전의 의술을 익혔으며, 훌레구의 맏아들 아바카의 궁정에 의사로서 출사하였고, 아바카의 뒤를 이은 게이하투의 시대에도 의사로서 또 시종관으로서 몽골 군주를 위해 봉사하였으나 궁정을 떠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지는 않았던 그가 다시 이름을 드러낸 것은 가잔 칸의 치세기(1297~98년) 국사를 담당하고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는 재상으로[10] 임명되면서였다. 가잔 칸은 당시 재상으로 '천하의 사드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재상 사드르 앗 딘 잔자니를 국고를 남용하고 탕진하였다는 죄를 물어 처형시키고, 사아드 앗 딘 사바지와 라시드 앗 딘에게 재상부(부자라트)의 사무를 나누어 맡도록 하였다. 역사가 와싸프는 사아드가 재상 직책을 수행하고 라시드는 부관으로써 재상부의 일을 총괄하였다고 기록했으며, 카즈비니는 사아드가 재상부 사무를 전결하는 데 필요한 인장을 부여받았다고 하고 있어 사아드가 선임자이고 라시드는 그의 보좌역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라시드가 이 직책에 임명된 해에 대해 와싸프는 이슬람력 697년(1297~1298년), 카즈비니는 이슬람력 699년(1299~1300년)으로 기록하였다.

가잔 칸은 새롭게 재상으로 임명된 이들을 앞세워 재정적인 어려움을 타개할 개혁에 착수하였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 '가잔 칸 기'에는 가잔 칸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적 조치들을 명하는 칙령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지세(카라즈)를 비롯한 각종 세금 징수 방법을 개선하여 1년에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정해진 세액을 재무성(디반)에 납부하게 하였고, 상업이나 수공업을 대상으로 징수하던 상세(탐가)를 감면하였으며, 각지에 주둔하는 군관들을 부양하기 위해 발급하던 '지불증서'(바라트) 제도를 폐지하고 군인들이 농가에 숙박하면서 음식을 요구하던 관행도 중지시켰다. 나아가 국가나 개인이 소유하던 유휴 농지를 개방하여 무전 농민들에게 경작토록 하고, 은화의 교환 비율을 정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기도 하였다.

또, 가잔 칸은 라시드 알딘에게 몽골의 역사를 책으로 집필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것이 《연대기의 집성》(집사)의 시작이다.

가잔 칸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울제이투가 칸으로 즉위한 뒤에도 라시드 알딘은 재상직을 수행했다. 이때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선대 가잔 칸이 지시한 몽골 역사 집필을 완성하라는 울제이투의 칙명을 1306년 4월 12일 '가잔의 역사'를 헌정하기도 하였다. 또, 울제이투 칸은 술타니야를 그의 여름 수도로 삼아 대대적으로 그곳을 개발했는데, 라시드 앗 딘 역시 그 근교에 모스크, 학교, 병원을 비롯한 1,000호 이상의 가옥을 건설하고, 그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라시디야’라고 불렀다.

또한 하마단, 야즈드, 바그다드 등지에도 건물을 지어 자선용으로 헌납하였으며, 특히 1309년에는 가잔 칸의 수도였던 타브리즈 동북방 근교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건물들을 지었다. 이곳은 랍어 라시디 즉 '라시드 구'(區)라고 불리며 라시드 앗 딘 자신의 사후 묻힐 묘역도 조성되었고, 모스크나 마드라사, 도서관, 수도장(카나콰흐)를 비롯하여 수피나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 병원, 욕탕, 창고, 분수대 등 부대 시설들이 들어섰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100여 명의 고용인들도 근무하였다고 한다.

라시드 앗 딘은 견고한 바위를 뚫어서 그 근처를 흐르는 사라우 루드 강을 수로를 통해 랍어 라시디로 끌어들여 용수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공사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칸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라시드 앗 딘 자신은 기록하였다. 라시드 앗 딘은 전국 각지에 걸쳐 엄청난 재산과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일 칸국의 국사를 라시드의 가족들이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라시드의 아들 14명 가운데 8명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서부 이란과 그루지아, 이라크, 아나톨리아 등지를 관할하였다.

라시드 앗 딘은 샤피이 법학파를 추종하였는데(울제이투 칸이 라시드의 영향으로 샤피이 법학파를 추종하게 되기도 하였다), 샤피이파의 지도자인 니잠 앗 딘 압둘 말릭을 마라가의 수석 판관으로 임명하고, 1307년 12월에는 맘루크 왕조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처형될 운명에 처해 있던 바그다드의 수피 시합 앗 딘 수흐라와르디와 자말 앗 딘을 구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동료 사아드 앗 딘과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1312년 사아드 앗 딘은 '국고를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라시드가 그 후임으로 천거한 직물상이자 보석상이었던 타즈 앗 딘 알리샤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1315년 군인들에게 줄 급료가 부족해지자 그 책임 소재를 놓고 양자간 갈등이 심각해졌는데, 울제이투는 이를 중재하기 위해 라시드에게는 이란 중부와 남부를, 알리샤에게는 이란 서북부와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통치를 위임하여 양자의 관할구역을 나누었다.

울제이투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아부 사이드가 그의 직위를 계승한 뒤에 두 사람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라시드 알딘은 아미르 추판의 꼬임에 넘어가[11] 1317년 10월 공직에서 사퇴했다. 1318년 1월에는 몽골 고관으로 라시드의 마지막 후원자라고 할 수 있는 아미르 세빈치도 사망하였다. 알리샤와 그 일파는 라시드 앗 딘을 울제이투 칸을 독살했다는 죄명으로 고발했고, 라시드 앗 딘은 이슬람력 718년(1318년~19년) 7월 17일에 아들 이브라힘(당시 16세)과 함께 처형당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참수된 그의 머리는 이란 서북부 타브리즈라는 도시로 보내져 며칠 동안 조리돌려졌으며, 시민들로부터 "이것이 신의 이름을 악용한 유태인 놈의 모가지다. 그에게 신의 저주가 있으라!"라는 욕설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랍어 라시디를 포함해 라시드 앗 딘이 소유하고 후원했던 곳도 약탈당했다. 라시드의 아들로 유일하게 공직 생활을 계속하며 재상까지 올랐던 기야쓰 앗 딘도 1336년 봄에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였다. 라시드를 죽음으로 몰아간 알리샤는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며 메카의 성전에 엄청난 헌물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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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라시드 앗 딘의 시신은 자신이 생전 타브리즈 근교에 준비해 두었던 묘역에 매장되었는데, 1세기도 안 되어 티무르의 '미치광이' 아들 미란샤(재위 1404~1407)가 라시드 알딘의 무덤을 파헤쳐 유태인 공동묘지에 묻어 버렸다고 한다.

라시드 앗 딘은 유태인이었는가?

요약
관점

라시드 앗 딘의 생애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는 프랑스의 학자 카트레메르는 라시드 앗 딘 유태인설의 신빙성 여부를 이모저모로 검토한 뒤, 그가 유태인이라는 주장은 라시드 앗 딘의 정적들이 꾸며낸 이야기이고 라시드 앗 딘 물론 그의 조상들도 유태교를 신봉하지 않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도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라시드 앗 딘이 유태인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그 주장이 단순히 정적들의 모함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려운 몇 가지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는데, 우선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인 역사가 바르 헤브레우스(Bar hebreus)의 《연대기》에서 '라시드 앗 다울라'라는 이름의 한 '유태인'이 게이하투 칸의 궁정에서 칸을 위해 각종 음식을 준비하는 시종의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궁정의 재정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칸을 위한 양 한 마리조차 살 수 있을 지경이었고 이에 거금을 쾌척하여 수천 마리의 양과 소를 사들여 성찬을 준비하고 대신 각 지방으로부터 일정 금액을 수취할 권리를 얻었으며, 그러고도 지방에서 단 한 푼의 세금도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결국 파산해 도망쳐 버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라시드 앗 다울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이 당시 무슬림들이 이름 뒤에 으레 붙여 쓰는 '앗딘' 대신 붙여 쓰던 '앗 다울라'라는 표현이다('딘'은 종교를 뜻하는 반면 '다울라'는 '국가'를 의미하고, 비무슬림들은 자신의 이름 뒤에 '딘'을 붙이기를 꺼려했다). 라시드 앗 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모두 각각 이마드 앗 다울라, 무와팍 앗 다울라, 라이스 앗 다울라였다.

14세기 초 사카이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에서도 라시드 앗 딘을 '라시드 앗 다울라 아불 파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가 처형되기 직전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은 가난한 유태인으로서 약제사이자 의사에 불과했는데 가잔-올제이투 치세에 국사를 담당하고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게 되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라시드 앗 딘이 태어난 곳인 하마단은 당시 유태인들의 중요한 중심지였고, 그곳에는 예시바 즉 유태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도 존재하고 있었다. 라시드 앗 딘이 유태교 관습과 종교, 그리고 히브리어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도 고향의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아바카 칸의 궁정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지위도 점차 올라가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라시드 앗 딘'으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훗날 이슬람에 관한 신학적인 저작들을 다수 집필했던 것도 실은 유태인(유태교도)라는 비난을 의식하여 이를 부인하기 위한 의도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추정도 제기되었다.

저작들

요약
관점

라시드 알딘은 몽골제국이 성취한 정치적 통합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지식과 정보를 수집·번역하여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집필하여 발행했다.[12] 그의 저작은 역사 방면은 물론, 이슬람 신학, 식물학, 약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라시드 앗 딘은 자신이 집필한 저술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아랍어로 된 것은 페르시아어로, 페르시아어로 된 것은 아랍어로 번역시켜 모두 두 언어로 된 필사본을 완비하게 한 뒤, 이를 자신이 건설한 타브리즈 근교 라시드 구(랍어 라시디)에 비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저본으로 전체 저작을 해마다 한 부씩 필사하게 하였는데, 일류 필사 전문가와 삽화가들을 붙여 종이는 최고급 바그다드제 종이, 제본은 염가죽으로 쓰고, 완성된 것을 원본과 꼼꼼히 대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일 칸국 안의 중요 도시의 모스크에 보내 비치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읽거나 자유롭게 필사해 가게 하였다.

연대기의 집성

《연대기의 집성》은 역사서로,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세계의 주요한 종족들의 역사를 망라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최초의 세계사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13][14][15]

가잔 칸은 라시드 알딘에게 몽골제국의 역사를 집필할 것을 명령했다. 몽골제국사는 가잔 칸이 사망한 뒤인 울제이투 칸의 치세 초기인 1306년에 완성되었는데, 울제이투는 이 책을 《가잔의 축복받은 역사》(Tārīkh-i mubarak-i Ghāzānī, 일명 《가잔사》)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울제이투는 라시드 알딘에게 당시 세계의 주요한 종족들의 역사도 추가로 편찬할 것을 의뢰했다. 라시드 알딘은 이 명령을 받들여 세계 주요 종족들의 역사와 각 지역의 지리를 상술한 저작을 저술하였다(각각 《세계민족지》, 《세계지리지》). 이 책들은 이미 완성된 《가잔사》와 합쳐져 《연대기의 집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1310년 내지 1311년에 완성되어 울제이투에게 바쳐졌다. 하지만 현재 제 3부에 해당하는 《세계지리지》는 유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에서 라시드 알딘은 이전의 무슬림 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상당수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라시드 알딘이 유대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11]

라시드 집성

라시드 앗 딘 자신의 이슬람 신학 관련 저술들을 묶어 편집한 것으로, 이슬람력 710년(1310~11년)에 필사된 아랍어 사본 하나가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라시드 집성은 네 가지 저작을 포함하고 있다.

  • 해설(타와디바트)
서문과 각 19개 주제를 다룬 서한들로 이루어져 있다. 신학 및 신비주의에 관한 논설집으로 울제이투 칸의 요청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특히 열두 번째 서한에는 투르크,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관한 울제이투 자신의 글도 포함되어 있다.
  • 주석요결(미프타브 앗 타바시르)
울제이투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쿠란에 담긴 내용에 대한 주석, 주석가들과 그들이 활용한 방법, 선과 악, 보상과 징벌, 인간의 수명, 신의 섭리, 육체의 부활 등에 관한 글을 모은 것이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사본이 튀르키예에 전해지고 있다.
  • 제왕정요(파바이디 술타니야)
울제이투 칸의 어전에서 벌어졌던 신학 토론의 결과를 모은 것으로, 1307년에 집필되었고 이스탄불 누르오스마니에 도서관에 페르시아어 사본(no 3415)이 소장되어 있다.
  • 오묘진리(라타이프 알 바콰이크)
14개 서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저자가 705년 라마단(1306년 4월)에 꿈에서 성사 무함마드를 본 환상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신학적인 토론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도서관에 그 사본(no 3833)이 등록되어 있다.

동물·유물지

가잔 칸의 시대에 저술하기 시작하여 울제이투 칸 시대에 완성된 《동물·유물지》(Āthār wa ahyā)는 일종의 박물지로, 2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물, 식물, 광물, 건축, 금속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광물학, 농학, 수목학, 양봉술을 비롯하여 해로운 곤충과 파충류를 제거하는 방법, 농경과 목축에 대한 설명, 건축, 축성술, 조선술, 야금술, 금속 관련 각종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중국, 인도, 중동 지역의 농작물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16] 이 책의 중국의 작물과 농법에 대한 서술은 원나라1273년에 편찬한 《농상집요》(農桑輯要)에 기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일 칸의 조정에는 《농상집요》의 편찬을 담당하던 대사농(大司農)의 책임자로 있었던 볼라드 칭상이 있었기 때문이다.[12] 그 사본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05년 테헤란에서 그 일부가 출간되었다.

진리상해 =

1311년 작품으로 울제이투 칸이 관심을 가진 주제들에 관한 서술이다. 20개 서한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저자 라시드 자신이 젊어서부터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배운 의술, 천연두 같은 병에 대한 투르크인과 몽골인들의 대응 방법, 천문학과 역법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 하나에는 이슬람력 707년 샤왈 11일(1310년 3월 15일) 축일을 기념하러 모인 몽골의 아미르들에게 울제이투 칸이 지혜와 율법과 칭기즈 칸의 야삭(법령)을 준행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설상론 · 질의와 해답

13세기 말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튀르크 유목귀족들이 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의문과 관심에 대한 설명으로, 당시 그들 가운데는 여태 이슬람으로의 개종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보감

《보감》(Tangsūq-nāma; 寶鑑) 은 중국 서진(西晉)의 명의 왕숙화(王叔和)가 지은 중국 고대의 의서, 《맥경(脈經)》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책이다. 라시드 알딘은 이 책에 긴 서문을 붙였다.[12]

제왕통치서

중국과 몽골의 통치술에 관한 내용이 담긴 책으로 《오묘진리》에 언급되고 있으나, 그 사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토반은 이 책의 이름을 '중국통치서'라고 하였다.

기진서

라시드가 라시드 구(랍어 라시디)에 기진한 재산 관리 규정을 포함한 문서들의 모음으로, 라시드 자신의 자필 사본이 이란에 보존되어 있다.

서한집

라시드가 자신의 자식들과 고관들에게 국사에 관한 문제에 대한 충고와 권고를 담은 53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에는 이것이 라시드 앗 딘 자신의 글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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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서적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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