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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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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빈(Robert Rubin, 1938년 8월 29일~ )은 미국의 금융인이다. 1966년부터 1992년까지 골드만 삭스에서 일하며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백악관 경제정책 보좌관,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의 주범 중 한명이지만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낙하산인사를 통해 거액의 연봉을 받는 기업인이 되었다는 비난[1]을 받기도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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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뉴욕 시에서 태어난 그는 마이애미 비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로 진학하여 1960년에 경제학 전공으로 수마 쿰 라우데(최우수) 졸업했다. 그후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여 3일간 다니다가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학교를 영국 LSE로 유학을 갔다. 귀국한 후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여 3년후 1964년 법학 학사(LL.B.) 학위를 취득하였다.
첫 직장으로는 뉴욕에 위치한 클리어리 고틀립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66년에 그는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에 입사했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공동 회장과 공동 수석파트너 자리를 역임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빌 클린턴 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를 이끌었다. 1995년에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99년에 로런스 서머스가 그의 자리를 이었다. 2007년부터 외교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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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행정부
요약
관점
1993년 1월부터 1995년 1월까지 백악관에서 대통령 경제정책 보좌관으로서 국가경제위원회(NEC)를 지휘했다. NEC는 예산·조세·통상·빈곤 완화 등 경제 전반을 부처 간에 조정하고 대통령에게 정책 권고를 올리는 기능을 수행했다.[3][4]
1993년 재정적자 감축법
루빈은 적자 축소에 집중할 것을 조언했고 1993년 재정적자 감축법 설계의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지지자들은 이 법이 1990년대 말의 흑자와 성장에 기여했다고 본 반면, 반대자들은 증세 효과를 비판했다. 루빈은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 인상을 주장했다.[5][6][7][8]
재무장관 (1995~1999)
1995년 1월 10일 상원 인준(찬성 99–0) 후 70대 재무장관에 취임했다.[9][10] 재임 기간 미국 경제는 고용 호조와 물가 안정, 재정 흑자 전환을 경험했다는 평가가 있다.[11][12] 멕시코 페소 위기 때는 환안정기금(ESF)을 활용한 대출보증을 통해 위기 확산을 막았고, 미국은 이 거래로 이익을 남겼다.[13][14] 1999년 7월 초 재무부를 떠났고 후임은 로런스 서머스였다.[15]
균형재정 합의
루빈은 강한 달러와 균형재정을 통해 장기 금리 인하 여지를 만든다고 보았고, 공화당이 다수인 의회와의 협상에서 행정부 측 수석 협상가를 맡았다. 1997년의 균형예산법은 그의 재임을 상징하는 성과로 평가된다.[16][17][18][19]
파생상품 규제 논쟁
1998년 CFTC 의장 브룩슬리 본이 장외 파생상품 규제를 추진하자, 루빈과 앨런 그린스펀 등은 이에 반대했다. 이후 2000년 상품선물현대화법이 통과되어 장외 신용파생상품 상당 부분이 CFTC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20][21][22] 루빈은 회고록과 인터뷰에서 파생상품의 잠재적 위험과 규제 필요성에 공감했으나 당시 정치 환경상 입법 추진이 어려웠다고 밝혔다.[23][24][25][26]
도시·지역 투자
NEC와 재무부에서 금융기관의 지역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을 지지했고, 커뮤니티 재투자법(CRA) 적용 확대와 커뮤니티 개발 금융기관(CDFI) 육성, 권한구역·기업구역 지정 확대 등을 추진했다.[27][28][29][30]
글래스–스티걸법 쇠퇴
루빈은 글래스–스티걸법의 시대적 효용이 약화되었다고 보았으며, 1999년 7월 퇴임 뒤 같은 해 10월 시티그룹 경영진에 합류했다. 글래스–스티걸법의 핵심 분리조항은 후임 재무장관 재임 중 제정된 그램–리치–블라일리법으로 사실상 폐지되었고, 1999년 11월 서명됐다.[31][32][3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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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이후 경력
외교평의회(CFR)
2007년 6월 30일부터 2017년 7월 1일까지 외교평의회 이사회 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공동 명예의장으로 활동했다.[36]
시티그룹
1999년 시티그룹 이사회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합류했다.[37] 2001년에는 앤런 사태와 관련해 신용등급 강등 문제를 두고 재무부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상원 조사에서 불법 행위는 없었다고 결론났다.[38][39]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루빈의 역할과 책임 범위를 둘러싼 비판이 제기되었고, 관련 집단소송은 2012년에 5억9천만 달러로 합의됐다.[40][41] 미 재무부는 2008년 구제금융으로 시티그룹에 450억 달러를 투입했고, 정부는 이후 보유 지분 매각까지 합산해 순이익 120억 달러를 거뒀다.[42] 루빈은 2009년에 시티그룹을 떠났다.[43][44] 1999~2009년 보상총액은 1억2,600만 달러로 보도됐다.[45]
기타 활동
2002년 하버드 코퍼레이션(하버드 대학교 최고 집행기구) 구성원이 되었고 2014년까지 활동했다.[46][47] 2006년에는 해밀턴 프로젝트를 공동 설립했다.[48][49][50] 2018년 기준으로는 컨설팅사 센터뷰 파트너스의 시니어 카운슬러로도 활동했다.[51] 또한 마운트 사이나이 헬스시스템 이사, 피터 G. 피터슨 재단 공동자문위원장 등을 맡았다.[52] 아프리카 프로그레스 패널과 글로벌 시티즌십 커미션에도 참여했다.[53][54]
저서
회고록 In an Uncertain World(2003, 제이콥 와이스버그 공저)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55] 2023년에는 The Yellow Pad를 출간해 불확실성 속 의사결정과 확률적 사고를 다뤘다.[56][57]
정책 견해
재무건전성과 공공투자를 중시하며, 강한 달러 정책을 지지해 왔다. 고소득층에 유리한 감세에는 비판적이고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 등 누진적 과세를 주장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지지했고, 아동세액공제의 상환가능·항구적 확대에도 찬성했다. 2016년에는 영국의 EU 잔류를 공개 지지했다.[58][59][60][61][62][63][64]
기후변화
기후변화를 "우리 시대의 존재론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GDP 추계의 외부효과 반영, 기업의 탄소비용 공시, 연방 재정전망에 기후비용 반영 등을 제안했다. 리스키 비즈니스 프로젝트와 함께 금융공시 강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증권거래위원회에 보냈다.[65][66][67]
개인사
배우자는 주디스 O. 루빈으로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마이애미 비치의 템플 베스 숄롬 신도였다.[68][69]
같이 보기
- 루비노믹스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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