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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사도행전의 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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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학자들이 루가-사도행전이라고 부르는 두 권의 작품을 이룬다.[1] 두 권 모두 저자의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2] 이레네오(130~202)에 의해 처음 기록된 교회 전통에서는 저자가 바울로 서신 세 통에서 바울로의 동반자로 언급된 루가였다고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루가-사도행전의 저자가 의사 루가였다는 점에 의문을 갖는다. 이 주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20세기 말에는 거의 반반으로 나뉜 것으로 평가되었다.[3] 바울로의 동반자 루가에게 전통적으로 귀속되던 견해가 쇠퇴함에 따라 누가복음의 이른 연대설은 이제 거의 주장되지 않는다.[4]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작품이 약 기원후 80-90년경에 작성되었다고 보지만, 일부는 90-110년을 제안하기도 하며,[5] 2세기에도 수정되고 있었다는 주장의 본문비평적 근거(서방 필사본과 알렉산드리아 필사본 계열 간의 충돌)도 존재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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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공동 저작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동일한 익명의 저자에 의해 작성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루가-사도행전을 구성한다.[1]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기원후 80-90년경으로 추정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90-110년을 제안하기도 한다. 첫 번째 부분인 루가의 복음서는 하나님이 약속된 메시아인 나자렛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어떻게 이루셨는지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은 1세기 기독교의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예수의 승천을 시작으로 천국으로 향한다.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는 초기 장들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을 묘사한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메시지를 수용했지만, 나중에는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등을 돌린다.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한 이 메시지는 사도 바울로의 인도 아래 이방인들에게 전해진다. 후기 장들은 바울로의 회심, 소아시아와 에게해에서의 그의 선교,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서의 투옥을 이야기하며, 책이 끝날 때 그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두 책은 모두 저자의 후원자인 데오필로에게 보내졌으며—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를 의미하므로 전체 기독교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도행전의 서문이 예수의 삶에 대한 "이전 책"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거의 확실하게 우리가 루가의 복음서로 알고 있는 작품이다.
더욱이,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에는 언어적 및 신학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한 학자가 쓴 것처럼,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간의 광범위한 언어적 및 신학적 일치와 상호 참조는 두 작품이 동일한 저자로부터 나왔음을 나타낸다."[7] 공동 저작성 때문에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종종 간단히 루가-사도행전으로 통칭된다. 마찬가지로, 루가-사도행전의 저자는—저자가 실제로 루가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의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종종 "루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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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성에 대한 견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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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견해 - 의사 루가 저작설
전통적인 견해는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바울로의 동반자인 의사 루가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를 이방인 기독교인으로 보지만, 헬라계 유대인으로 보기도 한다.[8][9] 루가는 바울로의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24절)와 바울로에게 전통적으로 귀속되는 다른 두 서신(골로새서 4:14,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11)에 언급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저자가 루가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로를 실제로 만난 인물이라는데 동의한다.[10][11][12][13][14] [4]
루가가 루가-사도행전을 썼다는 견해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거의 만장일치였다. 복음서의 끝 부분이 포함된 가장 오래된 알려진 성경 사본인 파피루스 보드머르 XIV (기원후 200년경)는 "루가에 따른 복음서"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거의 모든 고대 자료도 이 저작 이론을 공유했는데, 이레네오[15], 테르툴리아누스[16],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7], 오리게네스, 그리고 무라토리 정경 모두 루가를 루가-사도행전의 저자로 간주했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나 다른 어떤 고대 저자도 저작에 대한 다른 전통을 언급하지 않는다.[주 1]
고대 자료가 제공하는 저작 증거 외에도, 일부는 루가-사도행전의 본문이 그 저자가 바울로의 동반자였다는 결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내적 증거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우리" 구절이라고 불리는 책의 일부 (사도행전 16:10-17; 20:5-15; 21:1-18; 27:1-37; 28:1-16)이다. 사도행전의 대부분은 3인칭으로 쓰여 있지만, 책의 몇몇 짧은 부분은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18] 이 "우리" 부분들은 바울로의 동반자의 시점에서 쓰여 있다. "바울로가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우리는 배를 타고 사모트라케를 향해 곧바로 항해하였다."가 그 예이다.[19] 이러한 구절들은 바울로의 사역 중 일부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여행했던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부는 이 증거를 사용하여 이 구절들, 그리고 루가-사도행전의 전체 본문이 바울로의 여행 동반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결론을 지지한다. 의사 루가도 자연스레 저자 후보가 된다.
또한 바울로의 여행을 묘사하는 서술에서 사용된 세부 수준이 목격자 자료를 시사한다고 주장되었다. 1882년 호바트는 루가-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어휘가 저자가 의학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1926년 캐드버리의 연구에 의해 반박되어 더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캐드버리는 본문의 의학 용어가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다른 비의사 저자들이 사용한 용어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20][21][22]
첫 번째 "우리" 구절은 사도행전 16:10으로,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루가가 복음서의 사건이나 사도행전 16:8의 트로아스에 바울로가 도착하기 이전의 사건에 대한 목격자가 아니라고 본다.[23] 루가 복음서의 서문에서 저자는 복음서의 사건들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이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언급하고 "세심한 조사"를 간과했다고 말하지만, 저자 자신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으며 "우리" 구절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건의 목격자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비판적 견해 - 바울로의 실제 서신에는 루가가 의사로 언급되지 않음
바울로의 진정한 서신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편지 수신자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바울로의 다른 "동역자"들 가운데 "루가"라는 이름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4:14에서는 루가를 의사라고 적지만, 골로새서를 위작으로 보는 신약학자들이 많다.[24]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11 또한 "루가"를 언급하며 그가 "나와 함께 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역시 위작으로 본다.[25]
비판적 견해 - "우리" 구절이 초기 자료의 파편이라는 견해
"우리" 구절에서는 서술이 1인칭 복수형으로 되어 있지만 저자는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루가-사도행전의 저자가 의사 루가였다는 점에 의구심을 표했으며, 이 주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20세기 말에는 거의 반반으로 나뉜 것으로 평가되었다.[3] 대신, 그들은 루가-사도행전이 본문 내에 기록된 어떤 사건의 목격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익명의 기독교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믿는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을 바울로의 동역자로 받아들이길 바랬을 뿐이다.[26]
버논 로빈스 (1978)는 "우리" 구절을 항해 여정 기록에 사용되는 그리스 수사학적 장치로 보았다.[27]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로빈스의 해양문학 장치 이론의 비일관성을 지적한다. 1인칭은 규칙으로 정의내리기엔 너무 예외적이며, 로빈스가 인용한 문헌은 언어적 범위(이집트어, 그리스어, 라틴어)와 시간적 범위(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후 3세기)가 너무 광범위하고, 인용된 많은 해양문학은 위작이 아닌 실제 1인칭 작품이었다는 점 등을 주장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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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논의에서 "우리" 구절의 해석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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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여러 구절들이 1인칭 복수("우리")로 쓰여져서 저자가 자신이 묘사하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는 "우리" 구절들은 이레네오에 의해 저자가 이 사건들의 개인적인 목격자였고, 바울로의 여행에 동반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처음 해석되었다. 이레네오의 "우리" 구절 이해는 여러 세기 동안 이 구절들에 대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이레네오 이후 천오백 년 동안 현대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저자가 목격자였다는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이의 제기는 없었다.[29]
이 해석은 20세기 중반에 지속적인 비판을 받았다. "20세기 두 번째 10년이 되자, 대부분의 사도행전 학자들은 저자가 다양한 문헌 자료로 서사를 구성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우리" 문제에 대한 목격자로서의 자료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0]
"우리" 구절에 대한 학문적 합의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 학계는 사도행전 16:10-17; 20:5-15; 21:1-18; 27:1-28:16에 나오는 이른바 '우리-구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31] 이를 받아들이는 세가지 시선은 각각 1) 저자는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얻은 관점을 제시한다; 2) 저자는 여행 일지 자료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3) 1인칭 복수 대명사는 문체적 삽입을 나타낸다는 것이다.[32][35] 문체적 삽입 이론을 넘어 의도적 기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36] 역사적 목격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사도행전이 바울로 서신들과 양립할 수 없는 신학과 역사적 서술의 차이도 근거로 내세운다.[37]
역사적 목격자
저자가 (루가 복음사가였든 아니든) 역사적 목격자였다는 "우리" 구절 해석은 현재 성경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견해로 남아 있다.[38]
편집자
"우리" 구절을 후기 편집자가 (루가 복음사가였든 아니든) 사도행전에 편입시킨 이전의 문헌 자료로 해석한다. 이 구절들의 명백한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나머지 대부분과는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39][40][41][42][43] 이 견해는 원본 텍스트와 그것이 통합된 문서 사이에 구별되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44]
문체적 관례
일부 학자들은 "우리" 구절을 이 시기의 항해문학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문학적 관례로 보았다.[45][46][47][49] [51][53][55][57][59] 그리고 그러한 문체적 관례의 존재를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61]사도행전과 소설 장르의 작품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도 지적되었는데, 이는 사도행전이 이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63] [66]
위조
바트 D. 어만에 따르면, "우리" 구절들은 저자가 바울로의 견해와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짓된 생각을 제시하기 위해, 바울로의 여행 동반자였다고 허위로 주장하는 누군가에 의해 쓰여졌다. 어만은 사도행전이 이로 인해 위조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67]
언어
학자들은 루가-사도행전의 저자가 사용한 언어를 '마르코 복음서보다 더 세련된 그리스어'로 특징지으며, '때때로 마르코 복음서의 헤브라이즘이 부족하거나(마르 11:9; 14:36 참조) 그리스어 등가물을 사용한다(루가 3:12; 6:15; 23:33)'고 말한다.[68] 그러나 '그리고 ~이 일어났다'와 같은 일부 전형적인 헤브라이즘 표현은 루가-사도행전, 특히 Q자료 구절에서 여전히 흔히 발견되며, 이는 셈어 자료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E. 얼 엘리스 (1999)는 루가 1:5–2:40; 5:1–11; 7:11–17, 36–50; 8:1–3; 9:51–56; 11:27f.; 13:10–17; 14:1–6; 17:11–19; 19:1–10; 23:50–24:53을 예로 들었다.[68]
일부 초기 학자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반부에서 셈족 관용구의 유행이 사도행전 후반부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반부의 사도행전 이야기가 대부분 레반트 내에서 일어난 반면, 후반부의 이야기는 대부분 레반트 외부의 이방인 환경에서 설정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또한 이야기의 지리와 셈족 관용구의 비율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찰스 커틀러 토리 (1906)가 사도행전 1-15장이 아람어 문서에서 번역되었다고 가설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토리의 주장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 기각되었는데, 그들은 사도행전 16-28장에도 많은 셈족 관용구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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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사도행전의 잃어버린 장
-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뢰성
- 바울로 서신들의 저작성
내용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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