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루도비코 카라치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의 바로크 화가 (1555-1619)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루도비코 카라치(이탈리아어: Ludovico Carracci, 1555년 4월 21일~1619년 11월 13일) 또는 로도비코 카라치(이탈리아어: Lodovico Carracci)는 볼로냐 출신의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화가이자 식각 및 판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넓은 제스처와 깜박이는 빛을 통해 영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며, 특히 형식주의적 매너리즘에 잠식되어 있던 이탈리아 미술, 특히 프레스코화를 되살린 공로가 있다고 평가된다. 그는 1619년 볼로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Remove ads
생애
루도비코는 볼로냐에서 프로스페로 폰타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고, 피렌체, 파르마, 베네치아를 여행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촌인 안니발레와 아고스티노 카라치와 함께 볼로냐에서 파바궁(Palazzo Fava)의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이야기》(1584)와 마냐니 궁전의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1590–1592)를 그리는 프레스코 연작 작업에 참여했다. 루도비코보다 5살 어린 안니발레가 세 명 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러한 명성으로 안니발레는 로마 파르네세궁의 《신들의 사랑》이라는 작업을 맡기도 했다. 아고스티노도 잠시 로마로 가서 안니발레와 함께 작업했다.
루도비코가 볼로냐에 남았다고 해서 그의 영향력이 작았던 것은 아니다. 란치의 전기에 따르면 약 1585년경 루도비코와 사촌들은 소위 ‘절충주의 아카데미’(또는 아카데미아 델리 인캄미나티, Accademia degli Incamminati)라 불리는 회화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아카데미는 정식 교육 과정을 갖춘 아카데미가 아니라 루도비코가 자신의 화실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화실은 로마와 그 밖의 지역에서 수많은 에밀리아 출신 화가들이 두각을 나타내도록 했고, 16세기 후반 볼로냐 화파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여기에 속한 화가로는 알바니, 구에르치노, 사키, 귀도 레니, 란프란코, 도메니키노 등이 있다. 카라치 가문은 제자들에게 자연 관찰과 자연스러운 자세에 집중한 습작을 하게 했으며, 인물을 그릴 때 과감한 비례를 사용하도록 가르쳤다.[1] 루도비코의 주요 제자로는 자코모 카베도네와 프란체스코 카물로가 있다.
Remove ads
반환
2009년, 루도비코 카라치의 작품 《성 제롬》(약 1595)이 나치에 의해 박해받고 약탈당했던 독일계 유대인 미술상 막스 슈테른의 상속인에게 반환되었다.[2][3]
작품
-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1582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1591년, 구에르치노가 이 작품을 찬탄하여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라 카라치나”(La Carraccina)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짐[4]
- 《성모자와 성인들》, 1607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수태고지》, 1603년에서 1604년 사이
- 《바르젤리니의 성모》, 1588년
- 《변모》, 1595년
- 《아브라함과 세 천사》, 1610년에서 1612년 사이
- 《대하수도에 던져진 성 세바스티아누스》, 1612년, J. 폴 게티 미술관
- 《성모 마리아의 장례식》, 파르마 국립미술관
- 《광야에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그리스도》, 1608년경에서 1610년경 사이, 베를린 국립회화관
각주
출처
외부 링크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