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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키아누스

서기 1세기 로마의 저술가 및 정치인, 군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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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Gaius Licinius Mucianus, 활동 시기: 서기 1세기)는 고대 로마의 장군 및 정치인, 저술가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황제에 오르는 데 배후에서 활약했다고 여겨진다.

생애

그의 이름은 그가 입양을 통해 무키아 씨족에서 리키니아 씨족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1] 무키아누스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같이 클라우디우스의 명으로 아르메니아로 파견됐다. 그는 네로 집권기에 보조 집정관이었으며, 아마도 63년 혹은 64년 기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

무키아누스는 바로 이전 해에 유대 반란이 일어나고 난 뒤인 67년에 시리아 총독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미래의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서기 66년에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유대 지역에 특별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처음에, 무키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로를 향해 좋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들 간의 번목은 69년을 시작으로 풀리게 되었다.[3] 갈바가 죽은 후, 무키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 둘은 오토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으나, 내전이 발생하자,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당시에 로마 황제 자리를 차지했던 비텔리우스를 상대로 맞서자고 설득했다.[1]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방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무키아누스는 소아시아트라키아에서 비텔리우스를 공격하는 일을 했다.[1] 이러던 와중에, 그는 다키아의 모이시아 침공을 격퇴하였다.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사망한 뒤에 로마에 도착했고,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을 찾아냈으며,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1]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헌신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오만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호의를 유지했다.[1] 그는 70년에 프라테스 아브랄레스의 문서들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로널드 사임은 무키아누스가 갈바의 부재중에 입성했다고 보았지만, 그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고 뒤따라서 입성했을 수도 있다.[4] 그는 72년에 그의 생애 세 번째 집정관 (보조집정관)직에 임명되었다.[5] 티투스 혹은 도미티아누스의 집권기에 무키아누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봤을 때, 그는 아나 베스파시아누스 집권기에 사망했을 것이며,[1] 심은 그의 사망이 78년 이전이었을 거라고 보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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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활동

유능한 저술가이자 역사가인, 무키아누스는 원로원의 의사록들에 대한 자료들 (res gesta senatus)을 포함해, 로마의 오래된 공화정 시기의 연설문들과 문서들을 수집했다.[1] 그는 플리니우스[1] 놀라운 사건들에 대한 자료로써, 자주 인용한 문서인 동장의 자연사와 지리를 주로 다룬 연구 논문의 저자이기도 했다.[7]

각주

추가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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