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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야

일본 제국이 3년 8개월 간 지배한 말레이반도 지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마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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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야(일본어: マラ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약 4년 간 일본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말레이시아 지역 중 말레이반도싱가포르 지역으로, 일본 제국 시기 대표적인 외지이다. 1941년 12월 대동아공영권에 따라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1942년 말레이 전역에서 일본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해협 식민지영국령 말라야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43년 일본은 태국의 요청에 따라 마라야의 9개 주 중 4개를 태국에 이양했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일본의 지배 기간을 가리켜 3년 8개월로 부르기도 한다.

간략 정보 マラヤ, 표어 ...

점령기 동안 일본은 싱가포르를 사실상의 행정수도로 삼고, 이 지역에 다양한 행정기관을 세웠다. 마라야와 북보르네오에서 바나나 머니라고 불리는 지역 통화를 발행했다. 페낭 지역은 잠수함 기지로 활용되어 일본 제국 외에도 나치 독일 해군의 몬순 그룹이 페낭에 주둔하였다. 일본 제국은 통치 이념으로 대동아공영권과 서구 식민주의 배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일본인은 이 지역에서 말레이인을 배제한 배타적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대표적으로 1942년 싱가포르 함락 이후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숙칭을 자행했고, 점령 기간 내내 말레이반도에 거주하던 중국인과 말레이인을 위안부로 만들기도 했으며 일본인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을 투옥하기 위해 푸두 감옥, 창이 감옥 등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 제국의 조직적 차별 및 폭력에 대항해 말레이시아인들 중 일부가 1941년 12월 말라야 인민항일군을 조직하고 말라야 공산당 및 영국과 연합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44년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후퇴를 거듭하자, 같은 해 4월 일본은 말라야에서 말라야 의용군을 조직하고 지역 헤이호로 이들을 충당했다. 그러나 1945년 9월 2일 페낭에서 말라야 주둔 일본군이 영국군 HMS 넬슨에 항복하면서 일본군의 통치도 종식되었다. 일본군의 철수 후 태국이 점령한 시 랏 마라이는 말라야에 반환되었고, 1945년 9월부터 영국이 1년간 말레이 군정을 수립해 일본군의 행정을 이양받았다. 1946년 4월 1일 말라야 연방이 수립되었지만 옛 해협 식민지였던 싱가포르, 페낭, 말라카는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말라야 연방에 편입되었다. 한편 일본군에 대항했던 말라야 인민항일군 대원들은 1949년 말라야 민족해방군을 창설해 말레이시아 공산당에 가입하고 영국 행정부에 맞서 싸웠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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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동아시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의 외무대신을 지낸 아리타 하치로가 주장한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일본 제국 육군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일본 제국 장성들은 새로운 일본 제국을 19세기 초반 미국이 주창한 먼로주의와 유사한 것이라 생각했다.[2] 다만 일본 정부의 대외적 팽창 정책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되었던 것으로 일본 남쪽의 여러 지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남진론은 이미 1907년 일본의 국가 방어 정책으로 채택되었다.[3] 남진론에 입각해 일본 정부는 식민지였던 대만에 대규모 현대화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측에 참전하여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였던 남양 군도를 1919년 외지로 획득하였다.[4]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1940년 8월 1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구상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5] 그러나 이 사상은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여러 형태로 존재해 왔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개념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것”이라는 명분 아래 서구 열강들에게 중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주장에 대한 반격 능력이 거의 없었다.[6]

공영권의 범위에 속한 많은 나라들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사례처럼 일본에 호의적인 여론을 가진 주민층도 존재했다. 또 일부 지역은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점령하여 괴뢰 정부를 세웠거나, 만주국처럼 이미 일본의 영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 덕분에 실질적인 권위나 공동의 정치적 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영권 구상은 비교적 손쉽게 형성될 수 있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선전을 통해 이 공영권은 서구 제국주의와 지배로부터 벗어나 아시아 각국이 ‘공동 번영’과 ‘평화’를 누리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자애로운 일본’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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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일본 육군 군사국 제82부대는 1939년 또는 1940년에 대만에서 설립되어 말라야반도 내부에 밀정을 심고 지역 토호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활동했다. 최종 계획 단계에서 이 부대는 당시 하야시 요시히데 대령의 지휘 아래 있었다. 말라야에 관한 정보는 일본 대사관 직원, 일본이 설립한 ‘거북회(Tortoise Society)’의 조직원들,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말라야인들, 그리고 일본·한국·대만의 사업가와 관광객들로 구성된 정보망을 통해 수집되었다. 또한 일본 스파이들 중에는 영국 정보장교 패트릭 스탠리 본 히넌 대위와 샘필 경(Lord Sempill)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정보와 지원을 제공했다.

적대 행위가 시작되기 전, 후지와라 이와이치와 같은 일본 정보 장교들은 ‘기관(Kikan)’이라 불리는 비밀 정보 사무소를 설립하여, 말라야 청년 동맹(Kesatuan Melayu Muda) 및 인도 독립 연맹(Indian Independence League) 등 말레이·인도계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했다. 일본은 이들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그 구성원들로부터 정보 제공과 함께 침공 이전에 연합군의 병력 이동, 규모, 배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협조를 받았다.[8]

1941년까지 일본은 4년 동안 중화민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일본군은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석유 등 수입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1940년에서 1941년에 걸쳐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에 대한 석유 및 군수물자 공급 금수를 단행했다. 이 금수 조치의 목적은 중국을 지원하고 일본이 중국 내 군사행동을 중단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은 국격의 손상이라고 판단하고, 대신 미국·영국·네덜란드가 지배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심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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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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