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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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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리치(이탈리아어: Marco Ricci, 1676년 6월 6일~1730년 1월 21일)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이다.

생애
마르코 리치는 1676년 이탈리아 벨루노에서 태어났으며 1694~1696년 밀라노에서 바로크 화가였던 삼촌 세바스티아노 리치에게 처음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1] 젊은 시절 그는 싸움꾼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1696년에 삼촌과 함께 베니스로 떠났지만 도시를 떠나야 했다.[1] 그는 로마를 방문하여 한동안 원근법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2] 1706~1707년 그는 피렌체에 위치한 펜지궁의 Sala d'Ercole 장식 작업을 삼촌과 함께 진행했다.[1] 다른 예술가들과 협업을 선호하는 리치의 성향으로 인해 그의 초기 스타일을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클로드 로랭, 가스파르 뒤게, 살바토르 로사 등의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17세기와 18세기 초 베네토에서 실천된 자연주의적 풍경화 스타일에도 영향을 받았다.[3] 리치는 제노바 화가 알레산드로 마냐스코와 가깝게 지냈으며 마냐스코의 자유롭게 휘날리는 듯한 화법과 길고 가늘고 뻣뻣한 인물 묘사는 리치의 초기 작품에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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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시절
1708년 후반, 리치는 베니스의 영국 대사이자 제4대 맨체스터 백작, 찰스 몬태규의 권유로 잉글랜드로 여행을 떠났고, 가는 길에 네덜란드에 들러 네덜란드 풍경화를 공부했다.[4] 잉글랜드에서 그는 헤이마켓의 퀸스 극장에서 이탈리아 작품을 상연할때 역사화가 조반니 안토니오 펠레그리니와 자주 협업했다.[5] 이 두 화가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와 니콜라 하임의 이탈리아 오페라인 《피로스》(Pyrrhus)와 《드미트리우스》(Demetrius), 그리고 안토니오 마리아 보논치니와 실비오 스탐필리아가 각색하고 오언 스위니가 영어 대본을 쓴 《카밀라》(Camilla)의 무대 배경을 그렸다.[6] 그는 펠레그리니와 함께 벌링턴 하우스의 6개의 대형 신화 캔버스를 제작했다.[6] 리치는 1711년에 베니스로 돌아갔지만 이듬해 삼촌 세바스티아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여러 의뢰 작업을 협력하여 맡았다.[6] 영국에 머무는 동안 마르코 리치는 여러 풍경화와 카프리치오, 그리고 제3대 칼라일 백작 찰스 하워드에 대한 풍자 작품인 《오페라 리허설》도 그렸다.[6][7] 풍경화가로서의 그의 작품은 고산 풍경이나 목가적 풍경, 시골의 격렬한 폭풍과 폐허 그리고 마을이나 안뜰 풍경 등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7] 그의 작품 대부분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였지만 그의 작품 중 약 절반은 염소 가죽에 템페라를 칠한 크기가 작은 그림이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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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마르코 리치는 1716년에 베니스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삼촌과 함께 살았다. 1720년대에 리치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에는 풍경화, 카프리치오, 양피지에 그린 구아슈, 무대 디자인 도안 및 캐리커처 등이 있다.[8] 그는 삼촌 세바스티아노와 함께 기념비적인 구상화 작품을 그렸다.[9] 1723년부터 마르코 리치는 폐허와 인물이 있는 풍경과 전망을 담은 자신의 그림에서 여러 장의 판화를 조각했는데, 이 판화에는 피라네시를 연상시키는 23점의 주요 판화가 포함되어 있다.[10][11] 베니스에서 리치의 중요한 후원자는 영사 조셉 스미스와 장로 안토니오 마리아 자네티였다.[8] 마르코 리치는 당시 곧바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새로운 스타일의 베네치아 풍경화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한다.[12] 그는 1730년 베니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도메니코 베르나르도 질로티와 주세페 발리아니가 있다.[13]
작품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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