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말레이시아 합의
1963년 9월 말레이시아 수립에 합의한 문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말레이시아 합의(영어: Malaysia Agreement, Perjanjian Malaysia; 马来西亚协定; மலேசிய ஒப்பந்தம்)는 1963년 9월 16일 체결된 협정으로,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말라야 연방, 북보르네오, 사라왁과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에 관한 협의'이다. 이 합의는 말라야 연방, 북보르네오 왕령식민지, 사라왁 왕령식민지, 싱가포르주를 하나의 연방인 말레이시아로 만드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1] 1961년 11월 15일 초안이 작성되었고, 1963년 7월 9일 당사국이 협정에 서명했으며, 1963년 9월 16일 합의가 공식 발효되었다.[2] 영국은 1963년 7월 31일 1963년 말레이시아 법을 통해 말레이시아에 대한 기본 골자를 제공했다.[2] 합의가 공식 발효된 9월 16일은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시아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963년 9월 16일 합의가 발효된 이후, 말레이시아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국가를 구성하게 되었다. 새로운 말레이시아 헌법은 이미 자치를 이룩한 싱가포르(1959)과 사라왁(1963.7)의 헌법을 참고하여 '말레이시아 법안'을 바탕으로 제정되었다.[3] 말레이시아의 수도는 말라야 연방의 수도였던 쿠알라룸푸르로 지정되었고, 1963년 11월 8일 말레이시아 의회 청사가 완공되었다.[4] 1964년에는 말레이시아 수립 이후 처음으로 총선이 진행되었지만 말레이시아에 통합된 사라왁, 싱가포르, 북보르네오에서는 선거가 진행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가 수립된 이후 대두된 가장 큰 문제는 인종 문제와 인도네시아와의 갈등이었다. 1963년 1월 11일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수립에 맞서 말레이반도와 사라왁 지역에서 제한적인 작전을 수행하면서 말레이시아의 치안을 위협했지만 1966년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인정했다.[5] 싱가포르주는 말레이시아 중앙정부와 인종 정책 및 재정 정책을 두고 대립하다가 1964년 싱가포르 인종 폭동을 계기로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과 합의를 거쳐 독립했다.[6] 1960년대 초중반 이어지던 사회 불안정과 말레이시아의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한 불만은 결국 1969년 5·13 사건으로 폭발했다.[7]
Remove ads
배경
요약
관점
영국의 자치권 부여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은 공식적으로 말라야 연방의 독립을 선포하고 옛 영국의 해협 식민지였던 말라카와 페낭을 말라야 연방의 영토로 병합했다.[8] 1959년 6월 3일에는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자치를 인정받고 리콴유가 1959년 5월 싱가포르 총선을 통해 초대 싱가포르 총리로 당선되었고, 영국 총독에서 양 디페르투안 네가라로 지도자의 호칭이 변경되었다.[9] 말레이시아 수립 논의가 진행되던 1963년 7월 22일 사라왁 왕국이 자치를 부여받았고,[10] 1963년 8월 31일에는 북보르네오가 자치를 부여받았다.[11]
통합 논의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1961년 11월 15일 말레이시아 법안이라는 새로운 법안의 초안이 작성되면서 기초가 마련되었다.[12] 이 법안에 따르면 말레이반도에 새로운 통합 국가의 명칭은 말레이시아가 되어야 하며 말레이시아의 헌법은 말라야 연방법을 기본으로 하되 개정을 거쳐서 말레이시아 헌법을 새로 제정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12]
이 법안을 기조에 두고, 영국 정부는 1962년 1월 17일 왕립 위원회인 커벌드 위원회를 수립해 말레이시아 통합에 대한 사라왁과 북보르네오 주민들의 의견을 구했다.[13] 또한 커벌드 위원회는 말레이시아 수립 이전에 말레이시아 헌법을 제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도 했다.[14] 1962년 6월 21일 활동을 승인받은 위원회는 동년 8월 1일 보고서를 작성했다. 커벌드는 말레이시아 수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지만, 말레이시아 수립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가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5] 위원회는 새로운 국가의 명칭을 말레이시아로 정하고, 말레이시아의 종교는 이슬람으로 하되 다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16] 한편 1962년 사라왁 공산주의 반란으로 인해 사라왁 전 총독이었던 앤서니 아벨은 말레이시아 수립이 공산당의 동남아시아 진출 저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16]
1962년 7월 31일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과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이 말레이시아 수립 날짜를 1963년 8월 31일로 정하자고 합의하면서,[17] 말레이시아에 참여할 다른 국가들도 통합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사라왁 지도자들은 1962년 7월 회담 결과를 듣고 충격을 받아 1941년 사라왁 헌법에 기초한 18개조 합의안을 제출했다.[18] 1962년 8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툰 푸아드 스테픈스는 북보르네오의 지도자들을 모아 14개조 합의안을 제출했고 이는 사라왁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19] 싱가포르 역시 1962년 9월 1일 말레이시아와의 통합을 두고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 뒤 시민 투표를 진행했다. 이 시민 투표에서 "나는 싱가포르에 노동·교육 및 1961년 명령문서 제33호에 명시된 기타 합의된 사안들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합병을 지지하며, 싱가포르 시민들이 자동으로 말레이시아 시민이 되는 것에 동의한다."는 선택안 A에 싱가포르 시민 95.82%가 지지했다.[20]
정치인들의 생각
데이비드 사울 마셜을 비롯한 싱가포르 일부 정치인들은 1955년부터 싱가포르가 말라야 연방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총리 탄쿠 압둘 라만은 이 주장에 반대했었다.[21] 탄쿠 압둘 라만은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가 통합 말레이시아에 포함될 경우 말레이시아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고,[22] 이에 따라 1960년 6월부터 싱가포르 뿐만 아니라 북보르네오까지 말라야 연방에 통합하는 새로운 연방을 구상하고 있었다.[21] 영국, 말라야 연방, 그리고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을 통해 말레이반도 일대에 공산 세력이 퍼질 것을 우려해 통합을 지지하기 시작했다.[23] 1960년까지 이어진 말라야 비상사태 이후 탄쿠 압둘 라만은 싱가포르가 남아메리카의 쿠바와 같은 상황이 될까 우려하는 한편, 동남쪽의 인도네시아가 급격히 성장해 말레이시아를 병합할 것을 걱정했다.[21] 1963년 사바와 북보르네오의 지도자들을 이끌었던 툰 푸아드 스테픈스는 말레이시아가 수립된다면 싱가포르, 말라야, 사라왁, 사바로 구성된 연방제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말라야 연방과 같이 자치가 한정된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24]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였던 리콴유는 1961년 9월 13일 "통합을 위한 전투"라는 이름으로 싱가포르 국민들에게 말라야와의 통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다.[25] 리콴유와 툰쿠는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싱가포르의 통합 방향에 대해 합의점을 이끌어냈다.[26][27]
Remove ads
합의안 채택

1963년 7월 9일, 영국 런던에서 사라왁 왕국, 북보르네오, 영국, 싱가포르주, 말라야 연방의 대표단은 새로운 국가인 말레이시아를 수립하는데 합의하고 협정에 서명했다. 브루나이는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결국 합의안에 서명하지 않았다.[28] 이 합의안은 1963년 7월 31일 영국 정부가 1963년 말레이시아 법을 통과하면서 정식으로 발효되었지만,[29] 실효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의 수립에 반대하며 여전히 군사 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북보르네오와 사라왁이 실제로 말레이시아에 통합되기를 원하는지 확인하려는 유엔 임무단을 말레이시아 총리 툰쿠가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합의는 공식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싱가포르, 사라왁, 북보르네오, 말라야 연방은 말레이시아라는 새로운 국가로 통합되었다.[30]
싱가포르주
1961년 8월 리콴유와 툰쿠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 통합될 때 싱가포르의 국방, 외교, 안보는 말레이시아 연방정부가 맡고 교육 및 노동 정책은 싱가포르 주정부가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26][27]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수립이 정식 인정되었지만, 리콴유는 1963년 8월 31일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포하고, 말레이시아 중앙정부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선언했다.[31] 이러한 조치는 영국 당국과 말레이시아 당국을 당황하게 했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주가 말레이시아에 정식으로 편입되자, 1963년 9월 21일 싱가포르에서는 싱가포르 법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치렀고 여기서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압승을 거두었다.[32]
Remove ads
같이 보기
- 2022년 말레이시아 헌법 개정
-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 말레이시아 선언
출처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