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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웰시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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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웰시 헤밍웨이(Mary Welsh Hemingway, 혼전 성씨: 웰시, 1908년 4월 5일~1986년 11월 26일)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네 번째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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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미네소타주 워커에서 태어난 웰시는 제재업자의 딸로 태어났다. 1938년 웰시는 오하이오주 출신의 연극 전공 학생이었던 로런스 밀러 쿡(Lawrence Miller Cook)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동거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별거 후 메리는 시카고로 넘어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에서 근무하였으며, 그 곳에서 윌 랭 주니어(Will Lang Jr.)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우정을 쌓으며 함께 근무하였다. 메리는 런던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새 직장을 구하게 된다. 새 직장에서 웰시는 파리로 파견되었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몇 년간 파리에서 근무하게 된다.[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40년 프랑스의 항복 후 웰시는 런던을 거점으로 하여 전황을 취재하였다. 또한 윈스턴 처칠의 기자 회견장에 참석하여 이를 보도하기도 하였다.[2] 전쟁 기간 중 웰시는 호주 출신 언론인 노엘 멍크스(Noel Monks)와 결혼하였다.[1]
헤밍웨이와의 결혼


1944년 웰시는 런던에서 특파원으로 취재하던 중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나게 된다. 1945년에는 노엘과 이혼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쿠바에서 헤밍웨이와 결혼식을 올렸다.[2]
결혼 5달 이후인 1946년 8월, 메리는 자궁외임신으로 인해 유산을 하게 된다.[3]
결혼 후 메리는 수년간 쿠바에서 헤밍웨이와 함께 살았고, 1959년 이후에는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함께 거주하였다.[2] 1958년 쿠바에 머물던 중에는 남편과 함께 존 스터지스 감독의 영화 《노인과 바다》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극중 헤밍웨이는 도박꾼을 메리는 미국인 관광객을 연기하였다.[4]
케첨으로 이사한 이후인 1961년 7월 2일 아침, 메리는 헤밍웨이가 가장 아끼던 산탄총으로 자살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5] 메리와 다른 가족들은 기자들에게 자살이 아닌 사고였다고 말하였는데,[2] 사고 이후 5년 뒤에서야 메리는 헤밍웨이가 스스로 목숨을 거둔 것임을 인정하였다.[6]
후기 생애
1961년 어니스트가 사망 이후 메리는 헤밍웨이의 유저(遺著) 집행자 자격으로 활동하며 《움직이는 축제》, 《해류 속의 섬들》, 《에덴의 동산》 등 기타 사후 작품의 출판에 참여하였다. 메리는 소련의 번역가인 타티야나 쿠드럅체바(Татьяна Кудрявцева)에게 《움직이는 축제》의 원고를 주었고, 그 결과 영어 원본과 러시아어 번역본을 동시에 출간할 수 있었다.[7] 1976년에는 자서전 〈어땠을까〉(How it was)를 썼다.[8]
말년에 메리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65번가의 한 아파트에서 지내었다. 1986년 11월 26일, 오랜 투병 끝에 세인트루크 병원(St. Luke's Hospital)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메리는 유언장에서 어니스트 옆에 있는 케첨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하였으며, 유언에 따라 현재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묻혀 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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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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