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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스토틀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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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레온 스토틀마이어 시니어(영어: Melvin Leon Stottlemyre Sr., 1941년 11월 13일~2019년 1월 13일)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투수 코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통산 11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뉴욕 양키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으며, 그 이후에는 뉴욕 양키스,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애틀 매리너스 등지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선수로서 다섯 차례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며, 코치 시절에도 다섯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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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요약
관점
스토틀마이어는 아메리칸 리전 베이스볼에서 투수로 뛰었으며, 미국 워싱턴주 맵턴에 있는 맵턴 고등학교와 야키마 밸리 커뮤니티 칼리지를 차례로 다녔다. 뉴욕 양키스의 한 스카우트가 야키마 대학 팀에서 뛰고 있는 스토틀마이어를 발견해 1961년 6월 10일에 그와 사이닝 보너스 없이 계약을 맺었다. 양키스 구단 측은 스토틀마이어를 루키 레벨의 애팔리치안 리그 팀 할런 스모키스로 내려보냈지만, 8경기 만에 그를 클래스 D 뉴욕 펜 리그 팀 오번 양키스로 승격시켰고, 스토틀마이어는 오번에서 7경기를 뛰었다.[1]
1962년, 스토틀마이어는 클래스 B 캐롤라이나 리그 팀 그린즈버러 양키스에서 뛰며 17승 9패, 2.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63년에는 클래스 AAA 인터내셔널 리그 팀 리치먼드 버지니안스로 승격되었다. 당초 리치먼드에서는 선발과 중간 계투를 오가며 경기에 출전했으나, 이후 랠프 후크 양키스 단장은 그를 선발투수로만 기용하겠다고 밝혔다. 1964년 스토틀마이어는 평균자책점 1.42를 기록하며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이 부문 1위에 올랐다.[2]
1964년 시즌 중반에 메이저 리그의 콜업을 받은 스토틀마이어는 9승 3패를 기록하며 소속팀 뉴욕 양키스의 5년 연속 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고, 《스포팅 뉴스》의 표지 모델로도 등장했다. 7차전까지 치러진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스토틀마이어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밥 깁슨과 세 차례 선발 맞대결을 벌였는데, 2차전에서는 승리를 거뒀고 5차전에서는 노 디시전을 기록했으나, 마지막 경기인 7차전에서 패하면서 카디널스에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다.[3]
1965년 시즌, 스토틀마이어는 올스타전에서 아메리칸 리그(AL)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4] 또한 그해 20승을 거뒀으며,[5] 18완투, 291이닝, 1,188명의 타자 수 상대로 세 부문 AL 1위에 올랐다.[6] 다음해인 196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는 출전했다.[7] 하지만 시즌 20패로 리그 최다패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았다.[8] 1968년과 1969년에는 2년 연속 20승 고지에 올랐다.[5] 196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는 선발투수로 출전했다.[9]
스토틀마이어는 메이저 리그 통산 11시즌 동안 40번의 완봉을 기록했는데, 이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좌완 투수 샌디 쿠팩스와 동률로, 역대 44위에 해당한다. 그중 18회의 완봉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 동안 쌓아올린 기록이다.[10] 1975년 시즌 개막 전 뉴욕 양키스는 스토틀마이어를 방출했다.[11] 스토틀마이어는 메이저 리그 통산 164승과 2.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5]
타격 실력이 뛰어난 투수로 알려졌던 스토틀마이어는 1965년 7월 20일 경기에서 보기 드문 인사이드 더 파크 그랜드 슬램을 기록했다. 1964년 9월 26일 경기에서는 5타수 5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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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경력

뉴욕 메츠와 휴스턴 애스트로스
스토틀마이어는 1977년부터 5년간 시애틀 매리너스의 순회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13] 1983년 11월에는 뉴욕 메츠의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고,[5] 1984년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상과 1985년 사이 영 상을 연달아 수상한 드와이트 구든을 지도했다.[14] 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포함해 10년 동안 뉴욕 메츠의 투수 코치를 역임한 후에는 2년간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도 투수 코치를 맡았다.[1]
뉴욕 양키스
1996년, 스토틀마이어는 새로 부임한 조 토리 감독과 함께 양키스 코치진에 합류했다. 토리 감독의 휘하에서 스토틀마이어는 팀 평균자책점을 1996년의 4.65에서 1997년의 3.84까지 낮췄으며, 투수 코치로 재직하던 기간인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양키스 팀 평균자책점은 4.23을 기록했다.[15] 뉴욕 양키스가 5년 동안 네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투수진이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1]
2005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을 상대로 시리즈를 내준 후인 2005년 10월 12일, 스토틀마이어는 양키스에서의 10년간의 코치 생활을 마치고 사임을 표명했다. 사임 이유 중 하나로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와의 개인적인 불화를 언급했으며, 특히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디비전 시리즈 종료 후 마이크 소샤 에인절스 감독에게는 축하 인사를 건넸으면서도 같은 팀 감독에게는 하지 않았던 점을 문제 삼았다. 스토틀마이어는 “내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럼 조(토리)는?’이었다. 조 역시 훌륭한 일을 해냈다. 올 시즌 그가 보여준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기 팀 감독에게는 축하하지 않고 상대 감독에게만 축하하다니,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16] 양키스는 스토틀마이어의 후임으로 전 양키스 투수 론 기드리를 선임했다.[17]
시애틀 매리너스
2008년 시즌 시작을 앞두고 스토틀마이어는 존 맥라렌 감독이 이끄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으며,[18] 맥라렌 감독이 경질된 후 임시 감독 짐 리글먼 체제에서도 자리를 유지했으나, 시즌이 끝난 뒤 해임되었다.[19] 시즌 후 스토틀마이어는 야구계에서 은퇴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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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및 영예
미국 워싱턴주 맵턴의 시장 델 헌트는 1964년 10월 12일을 ‘멜 스토틀마이어의 날’로 선언했다.[21] 2012년, 스토틀마이어는 워싱턴주 아메리칸 리전 베이스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2] 2015년 6월 20일, 뉴욕 양키스의 올드타이머스 데이 행사에서 스토틀마이어를 기리는 기념 명판이 모뉴먼트 파크에 설치되었다.[23][24]
개인사
스토틀마이어는 워싱턴주 남중부에 위치한 맵턴에서 성장했으며,[25] 워싱턴주 이사콰에서 아내 진(Jean)과 함께 살았다.[26] 그의 두 아들 멜 주니어(Mel Jr.)와 토드(Todd)는 아버지를 따라 메이저리그 투수가 되었으나, 막내 아들 제이슨은 백혈병으로 인해 1981년에 1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7]
스토틀마이어는 존 하퍼와 함께 자서전 《Pride and Pinstripes》를 집필했으며, 이 책은 2007년에 출판되었다.[28]
2000년, 스토틀마이어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병세가 호전된 상태였던 몇 년간 다발성 골수종 연구재단을 열성적으로 후원했다.[29] 그러나 암은 2011년에 재발했다.[30] 2019년 1월 13일, 스토틀마이어는 암으로 인해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31] 그를 기리기 위해 양키스는 2019년 시즌 중 유니폼에 검은 완장을 착용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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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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