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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플랜

프랑스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재건 계획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모네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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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재건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프랑스는 경제 회복과 재건을 위한 재정비 계획을 수립했다.[1]:38 이 계획은 흔히 모네 플랜(Monnet Plan)이라 부르는 사업으로, 훗날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를 주창한 장 모네 프랑스 경제기획원장이 추진한 계획이었다. 이 사업의 정식 명칭은 1946년 1월 3일 공표한 〈현대화 및 설비 계획〉으로, 프랑스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한 혼합경제 방식의 경제 성장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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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모네

모네 플랜은 확장·현대화·효율성·현대적 경영 관행을 강조했다.[2]:280 이 원칙에 따라 국가와 기업은 투자 목표를 설정하고 투자 자금을 할당했다.[2]:280[1]:38 이 계획의 집중·우선순위 지정·정부의 경제 성장 방향 제시 원칙은 소비에트 연방식 계획 경제와 다르기 때문에, 지도주의 또는 '지표 계획'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2][3]:29–32 이 '지표 계획'은 일종의 프랑스식 계획경제로, 국가는 주요 방침을 계획하고, 민간은 이 방침에 따라 자유시장 원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집행하는 방식을 의미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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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의 배경과 그 근거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직후 프랑스 경제는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고, 전쟁 피해도 겪게 되었다.[1]:39 실제로 종전 직후 실질 국민 소득은 1929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5]:233 또한 부진한 투자로 인해 프랑스의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200명당 트랙터가 1대씩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43명당 트랙터가 1대씩 있었다.[5]:234

모네 플랜의 목표는 투자 증대와 경제 현대화였다.[5]:234 경제 현대화를 위해 경제 체제와 의식을 개혁하는 것도 모네 플랜의 목표였다.[1]:38 예를 들어, 농업의 기계화를 촉진하는 것이 있었다.[5]:259

또한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도 이에 발맞춰 1944년 3월 15일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가 주창한 강령에서 프랑스 경제의 혁신과 노동운동 조직화·사회보장제도 정착 등을 강령으로 채택한 상황이었고, 이에 발맞춰 경제·사회적 개혁이 함께 추진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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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플랜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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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마르티냑 거리 18번지, 장 모네는 이곳에 청사를 둔 경제기획원에서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원장을 맡으며 프랑스의 회복과 유럽 재건을 기획했다.

모네 플랜을 기획한 종합계획위원회는 1946년 1월 3일 프랑스 임시정부 주석 샤를 드골의 지시에 따라 설립되었다.[6]:152 모네 플랜의 공식 목표는 프랑스의 경제 생산력 증대, 무역에서의 우위 확보, 생산성 향상, 프랑스 노동자의 완전고용, 생활수준 개선이었다.[4]

모네 플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석탄·철강·전기·철도 운송·시멘트·농기계 등 6대 중요 목표 사안부터 시작하여 당시 프랑스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역량을 기반으로 1950년에 달성해야 할 생산량 및 기타 목표를 설정했다.[5]:247 이후 석유·화학·합성 비료·합성 섬유·조선 산업에서의 목표도 추가되었다.[1]:38

모네 플랜 실행 초기, 목표는 설정되었지만 집행 방법론은 없었다.[6]:151 그러나 초기 6개 목표 산업 중 3개인 석탄·전기·철도 분야의 국유화가 추진되었고 다른 분야에서도 국유화 논의가 오갔다.[2]:280 실제로 1946년 4월 8일 프랑스 전력공사가 출범했다.[4] 철강 산업에서는 정부가 업계 내부의 합병과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철강 업계에 보조금을 지원했다.[2]:280[6]:162–163 대신, 모네 플랜은 6대 기본 산업이 아닌 석유·제약·자동차와 같이 시장과 자본이 자연스럽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분야를 제어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행되지 않았다.[6]:162

모네 플랜의 실행 중심은 경제기획원이였다.[5]:237, 243 경제기획원은 재계에 기획원의 방침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경제 정책을 홍보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또한 정보의 원천이기도 했다.[5]:247[2]:282–283 1946년 경제기획원 산하 18개 각종 위원회에는 1000여명 이상의 위원들이 참여했다.[5]:246–247 각 위원회 위원들은 각 분야에서 고루 안배하는 원칙으로 선임되었다. 예를 들어, 전기위원회에는 재계 6명·노동계 3명·사무직 2명·전문가 5명·공무원 4명 등 22명의 위원이 선임되었다.[5]:248

모네 플랜의 기획 및 실행 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은 공산당 계열 노동조합·기독교 계열 노동조합·농민조합·프랑스 전국고용주협의회 기업인들의 동의를 얻어 각 위원회가 구성되고 실행되었다는 점이다.[5]:261 예를 들어, 주 48시간 노동제 원칙이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각 위원회의 조정이 매우 필요했다. 관계자들이 승인하지 않았다면 실행에 애로사항이 발생하였을 것이고, 경제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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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플랜의 행정 관리

장 모네는 경제기획원을 경제 부처 중 하나가 아닌 총리실에 산하에 편제하게끔 했다. 모네는 부처 간의 불필요한 마라톤 협상을 피하고 싶었고, 안정적 실행이 필요하다면 사퇴할 방안도 검토한 적이 있었다.[5]:245 예르긴과 스타니슬라프는 이것이 훌륭한 행정 조치였으며 정가에서 제기되는 변덕스러운 논란으로부터 경제 정책을 분리하는 성공했다고 평가했다.[3]:29–32

수백 명이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했지만, 경제기획원 직원은 규모가 작았고 고위공무원도 35명을 넘지 않았다.[5]:241[2]:282 하지만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파리에서 가장 창의적인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6]:153 경제기획원에서는 이후 프랑스 총리를 역임한 펠릭스 가이아르·훗날 유럽 경제 공동체 설립자 중 한 명인 로베르 마르졸랭과 그 외에도 에티엔 히르쉬·피에르 우리·폴 델루브리에 등 프랑스와 유럽을 주도한 인사들이 배출되기도 했다.[6]:153

외자 유치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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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투자는 모네 플랜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연간 국민 소득의 약 24%를 투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6]:161 프랑스의 생산력은 이미 저조했기 때문에 소비 억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자본 및 장비 수입 자금 조달을 위한 외자 유치를 추진했다.[5]:238 1946년 3월, 프랑스 대표단이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했다.[6]:158 프랑스 사절단은 프랑스 경제기획원이 제안한 《1946년 초 프랑스의 경제 및 재정 상황에 대한 통계 검토》보고서를 미국에 제시했다.[2]:279 이 보고서는 프랑스의 방침을 요약하고 미국의 차관이 어떻게 사용될지를 구상한 내용이었다.[5]:250 또한, 이 보고서는 프랑스어판과 함께 미국 의회를 겨냥해 영어판도 함께 작성되었다.[2]:279

1946년 5월 28일, 프랑스 정부는 미국 정부와 약 10억 달러 상당의 신규 차관과 세계 은행국제부흥개발은행으로부터 5억 달러의 차관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다.[6]:159[5]:254 그러나 프랑스가 요청한 30억 달러보다는 적었다.[6]:158 이러한 미국의 지원이 적었음에도 모네 플랜 추진에는 지장이 없었고, 1946년 11월 27일 〈현대화 및 설비 계획〉이 프랑스 정부에 정식으로 제출되었다.[5]:257–258, 260[6]:161

모네 플랜은 단기 긴축 조치를 실행했지만, 소비 지출 활성화를 공약했다.[5]:264 그러나 1947년, 인플레이션·가뭄·150년 만의 흉년으로 인해 프랑스는 생활필수품 생산에도 지장을 초래할 위기에 직면했다.[5]:264 미국은 유럽의 암울한 전후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1947년 6월 5일 조지 마셜 미국 국무장관은 "향후 3~4년간 외국 식품 및 기타 필수 제품(주로 미국산)에 대한 유럽의 요구 사항이 현재 지불 능력보다 훨씬 커서 상당한 추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성격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악화에 직면해야 한다"고 말했다.[7] 10개월 후인 1948년 4월 3일, 미국은 마셜 플랜을 추진하게 되었다.[8] 마셜 플랜에 따른 원조는 50개월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952년 먀셜 플랜 종료 시점에 맞춰 2년 더 연장되었다.[5]:259

마셜 플랜에 따른 미국의 대 프랑스 원조는 30억 달러 미만이었지만,[5]:269 이 원조 자금은 모네 플랜 추진에 대부분 사용되었다.[6]:173 미국의 원조 자금은 원자재 및 수입 기계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화로 판매되었다. 이때 사용된 프랑화와 대충자금은 프랑스 정부에서 다시 사용했다.[6]:172–173 1949년과 1950년에 모네 플랜을 추진하기 위한 50%~90%의 자금이 이 대충자금에서 지출되었다.[5]:269–270 1948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의 원조는 프랑스 내 전체 투자의 20%를 차지했으며, 그 영향으로 대형 제철소 건설 투자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했을 일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6]: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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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플랜의 목표 및 영향

모네 플랜의 목표는 야심찼다. 초기 목표는 1948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 생산량 수준에 도달하고, 1949년까지는 1929년 수준을 회복하고, 1950년까지 1929년보다 25% 더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다.[5]:248–249[6]:157 진행 결과 계획을 모두 달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르긴과 스타니슬라프는 이 계획이 중요한 시점에 "침체된 국가에 규율·방향· 비전·자신감·희망을 제시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950년대 이후 진행된 프랑스의 경제 성장을 의미하는 영광의 30년의 기반이 되었다.[3]

모네 플랜은 1950년 5월 9일 공개된 장 모네가 기획하고 로베르 쉬망 프랑스 외무장관이 제안한 쉬망 선언의 기반이 되었다.[6][1]:304–305[9]:1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프랑스는 세계 최대 석탄 수입국이었으며[6]:164, 모네 플랜은 독일산 석탄 수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6]:164 전쟁 이후 독일산 석탄이 독일 시장에 유리하게 공급되어 독일 경제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을 우려해,[6]:163–164 로베르 쉬망은 석탄 및 철강 회사가 카르텔 역할을 하여 국내 시장의 공급을 제한하는 것을 방지하게끔 했다.[9]:1 쉬망 선언의 방침은 그래서 시장의 통합과 생산 확대였다.[9]:1 "이렇게 성립한 산업 연합체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 위기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유럽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9]:1 쉬망 선언은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1958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10]

모네 플랜은 프랑스 경제기획원에서 첫 구상을 한 이후, 2006년까지 프랑스 경제 성장 계획을 추진했고, 이후 2006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스 국가전력분석원, 2013년 이후 프랑스 국가전략원으로 모네 플랜의 후속 계획 수립 및 기획 기능이 승계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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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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