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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리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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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리인 집단학살은 1835년부터 1863년까지 뉴질랜드 본토 마오리족의 이위인 응가티 무퉁가와 응가티 타마의 구성원들이 채텀 제도의 원주민인 모리오리인에 대해 저지른 대량 살인, 노예제, 그리고 식인[1] 행위였다. 침략자들은 약 300명의 모리오리인을 살해하고 남은 인구를 노예로 삼았다.[2] 이와 유럽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모리오리인의 인구는 1835년 1,700명에서 1870년 100명으로 급감했다.[1][3] 마지막 순혈 모리오리인 토미 솔로몬은 1933년에 사망했다. 현재 모리오리인으로 정체성을 가진 혼혈인은 천 명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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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모리오리인
모리오리인은 채텀 제도의 원주민이며, 특히 채텀섬과 피트섬에 살았다. (모리오리어: Rēkohu) 모리오리인들은 마오리족과 같은 폴리네시아 혈통을 공유한다.[4] 구전에 따르면 모리오리인들은 기원후 1500년경 동폴리네시아에서 채텀 제도로 왔으며, 이는 마오리족이 본토에 처음 도착한 지 수백 년 후였다고 한다. 이후의 이주는 본토 뉴질랜드에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다.[1] 주류 학계의 의견은 모리오리인들이 1500년경에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것이다.[4] 침공 당시 모리오리인들은 고립된 섬 환경과 해양 자원에 적응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모리오리인 인구는 약 2,000명으로 정점에 달했으며, 9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5]
섬에서의 부족 간 유혈 분쟁 후, 16세기에 고위 모리오리 족장 누누쿠-웨누아는 누누쿠의 법으로 알려진 비폭력 철학을 도입했다. 이 법은 모리오리 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3]
1791년 11월, 영국 측량선인 HMS 채텀호가 항로를 벗어나 섬들로 표류했고, 선장 윌리엄 로버트 브로턴 중위는 공식적인 깃발 게양식을 통해 이 섬들을 영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배 승무원과의 오해로 모리오리인 타마카로로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모리오리 장로들은 타마카로로가 총격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믿고 적절한 방문객 환영 의식을 계획했다.[6][7]
마오리 침략자들
두 침략 마오리족 부족인 응가티 무퉁가와 응가티 타마는 원래 타라나키 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다른 이위와의 머스킷 전쟁 중 고향에서 쫓겨나 웰링턴 항구 주변에 정착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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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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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승무원들의 강제적인 도움을 받아 응가티 무퉁가와 응가티 타마 부족의 수백 명의 마오리족이 포트 니콜슨에서 두 차례의 항해를 통해 브릭 고래잡이선 로드 로드니호를 타고 채텀 제도로 향했다. 강탈된[9] 배는 첫 항해에서 500명을 태우고 1835년 11월 19일에 도착했다. 두 번째 항해는 1835년 12월 5일에 도착했다.[10] 두 번째 그룹이 도착하자 "머스킷, 곤봉, 도끼로 무장한 전사 무리들이 족장들의 지휘 아래 모리오리 부족 영토를 가로질러 걸었고" "주민들에게 그들의 땅이 점령되었고 그곳에 사는 모리오리인들은 이제 속민이 되었다"고 단호하게 알렸다. 일부 모리오리인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살해되었다.[11]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적대감 때문에, 1,000명의 모리오리인이 섬 동쪽의 테 아와파티키에 모여 가능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젊은 구성원들은 모리오리인들이 마오리족보다 두 배나 많으므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로들은 누누쿠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6][1] 마오리족이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리오리인들은 결국 침략자들에 맞서 비폭력주의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으며, 누누쿠의 법을 "도덕적 의무"라고 묘사했다.[12]
회의는 평화로운 결정을 내렸지만, 침략 마오리족은 이 회의를 전쟁의 서곡으로 해석했다.[13] 그들은 회의에서 돌아오자마자 모리오리인들의 집을 선제 공격했다.[14] 약 300명의 모리오리인들이 살해당했고[15], 수백 명이 노예가 되었다.[8] 마오리족은 인구의 약 10%를 의례적으로 살해했다.[9] 일부 여성들에게는 말뚝이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도록 방치되었다.[16]
노예화 기간 동안 마오리 침략자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했다. 그들은 모리오리인들에게 소변과 대변을 사용하여 신성한 장소를 모독하도록 강요했다.[9] 모리오리인들은 모리오리인이나 마오리족과 결혼하거나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이는 본토 뉴질랜드에서 행해지던 관습적인 노예제와는 달랐다.[17]
1835년 침공부터 1863년 영국에 의한 모리오리인의 노예 해방까지 총 1,561명의 모리오리인이 사망했으며, 1862년에는 단 101명의 모리오리인만이 남았다. 살해된 많은 사람 외에도 유럽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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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의 거래

모리오리인들은 1850년대부터 뉴질랜드 정부에 섬의 원주민으로서의 지위 인정과 토지 반환을 청원했다.[6][1] 1863년 모리오리인의 노예 해방은 채텀 제도의 주재 판사의 선언을 통해 이루어졌다.[6]
1870년, 경쟁하는 토지 소유권 주장을 판결하기 위해 원주민 토지 법원이 설립되었는데, 이때 대부분의 마오리족은 타라나키 지방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법원은 마오리족에게 유리하게 판결하여 그들에게 토지의 97%를 할당했다.[6] 판사는 모리오리인들이 마오리족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이 없다고 판결했다.[1]
현대
순혈 모리오리인의 마지막 후손인 토미 솔로몬은 1933년에 사망했지만, 자신을 모리오리인으로 여기는 혼혈인 천 명 미만이 남아 있다.[19]
모리오리 문화는 1980년대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부흥기를 맞았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모리오리인에 대한 남아있는 신화를 바로잡았다.[20] 이러한 신화에는 모리오리인이 멸종했다는 주장[20]과 마오리족 이전에 모리오리인이 뉴질랜드 본토에 살았다는 주장이 포함된다.[1]
1994년 와이탕이 재판소 심리가 시작되어 채텀 제도의 원주민으로서 모리오리인의 지속적인 정체성 인정과 보상을 요구했다. 2001년 발표된 재판소 보고서는 모리오리인의 주장에 동의했다.[20] 2020년에는 합의된 역사 기록, 모리오리인에게 중요한 토지 이전, 1,800만 달러의 보상을 포함한 조약 합의안이 의회를 통과했다.[3][19]
채텀섬 최초의 모리오리인 마라에인 코핑아 마라에가 2005년에 문을 열었다.[20] 건물 중앙 기둥에는 1835년 살아있던 1,500명 이상의 조상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이름들은 1862년 모리오리 장로들이 편찬하여 조지 그레이 총독에게 보낸 것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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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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