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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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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牧會書信, pastoral epistles) 혹은 사목서신(司牧書信)은 신약성경의 정경 중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세 서신서를 묶어 부르는 말이다. 가끔 여기에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 편지들은 공통적으로 교회를 감독하는 일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목회 지침을 제시했다는 측면에 주목해 파울 안톤Paul Anton이 1926년에 처음 "목회pastoral" 서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
저작성
사도 바울로의 저작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지만,[2] 18세기부터 바울로 이후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3]
전통적 견해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4] 폴리카르포스[5] 등 속사도들이 이 서신을 인용한 점, 무라토리단편에서 본 서신을 사도 바울로의 저작으로 인정한 점, 오리게네스가 바울로의 서신이 총 14편 남아있다고 언급한 점,[6] 오리게네스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 주해를 작성한 사실이 인정되는 점[7] 등이 사도 바울로의 저작성을 뒷받침해준다.
비록 이 서신들이 다른 바울로 서신들과 문장에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수취인이 회중이 아닌 목회자 개인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라는 설명도 존재한다.[8]
비평학적 견해
본 서신의 문장이나 내용들이 다른 바울로 서신들과 크게 다르다는 이유로 현재는 본 서신들이 바울로 사후에 쓰여졌다고 보는 견해가 주되다.[9] 이런 주장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1807년에 주장한 이후로 성서비평학계를 중심으로 전세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10] 슐라이마이허는 본 서신들이 바울로의 시대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영지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서술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친다.[11]
장로(πρεσβύτερος) 혹은 원로라는 단어의 사용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보조자를 임명하고 보조자 중심으로 교회를 구성한 것과 대조된다.[12]
보다 남녀평등적 태도를 취했던 다른 서신들에 비해 남녀의 역할이 구별되어 서술된다는 점 역시 차이점으로 지적된다.[13]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 부분이 오히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 차용을 통해 고린도전서가 초대 교회에서 더 잘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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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연대
폴리카르포스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다.[15] 폴리카르포스의 사망 연대가 서기 155년에서 167년 사이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그 이전에 이 편지들이 작성되었음이 널리 인정된다. 이레니우스 역시 180년에 서술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에서 이 서신들을 인용한다.[16]
따라서 이 서신들은 최소한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2세기에 쓰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편지가 마르키온주의와 영지주의의 출현에 대응하기 위해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7][18][19][20]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만일 마르키온이 파문당한 직후부터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본 서신의 성립 시기는 서기 144년 이후로 비정된다.[21] 마르키온 정경에 이 서신들이 포함되어있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 중 하나로 삼는다.[22]
이 서신이 바울로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고 믿는 학자들은 대부분 바울로 사후인 서기 80~100년에 이 서신들이 집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바울로가 디모테오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독교 신앙을 언급한 것이 기독교 3세대들을 대상으로 한 편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결과이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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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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