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문서가설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문서가설
Remove ads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 DH) 또는 벨하우젠의 문서가설모세 5경이 4가지 문서의 형태로 독립적이고 유사하면서 완전히 갖추어진 형태의 서술로 되어있고, 그것들이 일련의 편집자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조합되었다고 가정하여 주장하는 이론이다. 독일의 구약학율리우스 벨하우젠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문서가설은, 20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학계에서 거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1] 이 이론에 따르면, 오경은 원래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네 개의 문서—야훼문서(J), 엘로힘문서(E), 신명기문서(D), 제사장문서(P)—를 바탕으로 구성된 합성 문서로 간주된다. 이들 문서는 각각의 약어로 지칭되며, 이 문서들 및 그 가설적인 완성 순서를 바탕으로 문서가설을 JEDP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Thumb
구약성서의 문서 가설도

고전적 문서가설은 야훼문서(J)를 솔로몬 시대(기원전 약 950년)로,[2] 엘로힘문서(E)를 그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9세기로, 신명기문서(D)를 요시아 왕 재위 직전인 기원전 8~7세기로, 그리고 제사장문서(P)를 에즈라 시대인 기원전 5세기로 각각 추정하였다.[3][4] 이 문서들은 여러 편집자들에 의해 서로 다른 시점에 결합되어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이해되었다.[5]

그러나 고전적 문서가설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현재 붕괴된 상태이다.[1] 이러한 변화는 주로 1970년대 중반 반 시터스(John Van Seters),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 롤프 렌토르프 등의 연구에 의해 촉발되었다.[6] 이들은 야훼문서의 작성 시기를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597~539년)보다 앞설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7] 엘로힘문서의 실체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8] 이와 더불어 나머지 세 문서의 성격과 범위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세 학자는 문서가설에 대한 비판에서는 공통점을 보였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제시하지는 않았다.[6] 또한, 문서가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양식비평 이론이 탄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단편가설(fragmentary model)과 보충가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이들 이론은 문서가설의 요소들과 결합되어 병행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이론들은 특정 가설에 깔끔하게 분류되기 어려운 복합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9] 또한 현대 학자들은 벨하우젠식 문서 연대 추정의 타당성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며, 『토라』의 완성 시기를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기원전 약 450 ~ 350년)로 보거나,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인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3 ~ 164년)까지 늦추기도 한다.[10]

Remove ads

비판적 재평가

요약
관점
Thumb
R. E. 프리드먼이 1997년에 분석한 토라의 출전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문서가설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 제기되었다.[1] 특히 1970년대에 출간된 세 권의 책이 문서가설의 전제들을 흔들었다. 반 시터스의 『역사와 전통 속의 아브라함』(Abraham in History and Tradition),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의 『소위 야훼문서』(Der sogenannte Jahwist), 롤프 렌토르프의 『오경의 전승사적 문제』(Das überlieferungsgeschichtliche Problem des Pentateuch)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문서가설에 대한 비판점은 유사했으나,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해석 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았다.[6]

반 시터스와 슈미트는 야훼문서(J)가 솔로몬 시대(기원전 약 950년경)에 작성되었다는 기존 문서가설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야훼문서의 작성 시기를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597~539년) 또는 늦어도 후기 왕정 시대로 추정하였다.[7] 또한 반 시터스는 엘로힘문서(E)의 존재에 대해서도 강한 회의를 표명하며, E 문서가 정말 있었다 하더라도 창세기의 짧은 두 단락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1]

렌토르프는 오경의 형성에 대해, 짧고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들이 축적된 후 두 계통의 편집자들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들 중 첫째는 예언자 그룹으로 대표되며, 신명기 전통을 따르는 편집자들이다. 둘째는 제사장 계열이다. 이 둘을 통해 편집된 문서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본다. 렌토르프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은 단편가설(fragmentary hypothesis)을 채택한다.[12][13][14] 반면, 반 시터스와 같은 학자들은 보충설을 지지하며, 기존의 저작물에 야훼문서와 제사장문서(P)가 두 차례 보충되면서 오늘날의 토라가 형성되었다고 본다.[15]

현대 학계에서는 이들 새로운 가설들을 문서가설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어떤 주장이 특정 이론에 명확히 속한다고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9] 오늘날 다수의 학자들은 신명기를 하나의 독립된 자료이자 요시아 왕 시대 법전의 산물로 보았던 드 베테(De Wette)의 견해에 따라, 포로기 동안 신명기 앞뒤에 부가된 모세의 연설과 첨가부를 통해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본다.[16] 또한 제사장 계열의 자료 역시 일정한 형태로 존재했음을 인정하지만, 그 범위와 종결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7] 나머지 자료는 비제사장 계열로 묶이며, 제사장 이전(pre-P) 및 이후(post-P)의 자료를 포함한다.[18]

최근 연구 경향은 토라의 최종 형태를 하나의 문학적·이념적 통일체로 보되, 다양한 초기 자료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페르시아 시기(기원전 539 ~ 333년)에 완성된 것으로 이해한다.[19][20] 소수지만, 그 최종 편집 시점을 더 늦추어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3 ~ 164년)로 보기도 한다.[21]

신문서가설(neo-documentary hypothesis)은 여전히 북미와 이스라엘 학계에서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다.[22] 이 이론은 문서의 구분을 문체나 언어가 아닌 이야기의 구성과 연속성에 기반하여 파악하며, 이를 이스라엘 종교사의 발전 단계와 직접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설에서 엘로힘문서를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엘로힘문서는 고전적 야훼문서(J)와 거의 구분되지 않으며, 유럽 학계에서는 이를 단편적이거나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대체로 거부하고 있다.[23]

Remove ads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