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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개방정책
특정 지역에 대해 모든 국민이 평등한 상업 및 공업 활동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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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개방정책(門戶開放政策, 영어: Open Door Policy)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이 청나라의 영토를 보존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평등한 무역과 투자를 보장받기 위해 수립한 외교 정책이다. 1899년 9월 6일 미국 국무부장관 존 헤이의 '문호개방 노트'에서 기원한 이 정책은 이후 유럽 열강들에 공유되었다.[1]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듯 '중국을 멜론처럼 나누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각서는 열강들에게 중국을 모든 나라에 대해 동등하게 개방해 둘 것을 요구했으며, 각국이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서 어떠한 조약항이나 기존의 이권에도 간섭하지 말 것, 중국 당국이 관세를 평등하게 징수하도록 허용할 것, 그리고 항만 사용료나 철도 요금에 있어서 자국민에게 특혜를 주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이 각서에 법적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열강은 이를 애매모호하게 지켰다. 1900년 7월 의화단 운동으로 서양 열강이 의화단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헤이는 원래 각서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제2차 문호개방 노트를 발표했다. 이후 몇십 년 동안 미국 정부와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은 문호개방정책을 기본 이념으로 삼았고, 중국 정부와 중국 측 인사들은 이를 활용해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문호개방'이라는 표현은 이후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설명할 때 다시 쓰였다.[2] 이후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신현실주의 학자들은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세계 기준이나 국제법에 따라 일반적으로 국가가 경제 또는 정치적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탈피할 때 '문호개방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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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정책 수립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 청나라는 일본 제국을 포함한 열강들에 분할되어 쪼개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은 새로 확보한 필리핀을 통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청나라 조정과 정치 및 상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4] 미국 정부는 열강 정부들이 중국에서 더 많은 이권을 확보할까봐 우려했으며 중국이 분할되면 미국 정부가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응해 윌리엄 우드빌 록힐은 중국 시장에서 미국의 이권을 보호할 수 있는 '문호개방정책'을 수립했다.[5] 1899년 9월 6일 존 헤이는 다른 열강들에게 이 각서를 보내 청나라의 영토와 정치를 보존하고 청나라에서 영향권을 확장하기 위해 조약항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6] 이 정책에서 미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는 동등하게 청나라 시장에 접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7] 헤이는 나중에 미국이 다른 열강들을 경제적으로 압도해 중국 시장을 독점하고 다른 국가들을 배척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8] 미국 정부의 요구에 대응해 열강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며 각국이 해당 내용을 인정하기 전까지 자신들은 입장을 정할 수 없다고 내비쳤다.[7] 그러나 1900년 7월 헤이는 열강 모두가 각서 내용에 동의했다고 선언했다. 1900년 10월 6일 영국 정부와 독일 정부는 양쯔강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 협정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은 청나라의 영토를 영향권에 따라 분할할 수 없다. 독일 정부가 문호개방정책에 동의한 이유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청나라가 분할될 경우 독일 정부가 이권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며 독일 제국 역시 청나라 전체를 시장으로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9][10]
후속 조치
문호개방정책은 청나라에 대한 동정을 키우고 청나라의 개발에 미국이 미칠 영향력과 미국이 청나라 시장에서 얻을 이익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다. 문호개방정책의 성과는 부분적으로 정치에서 나타났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정책이 중국의 발전과 보존에 '동정적인 정책'임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먼저 청나라는 내부적으로 개혁을 이루어내야 했고, 외부로는 영국,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프랑스 등의 침략주의를 막아내야 했다.[11] 미국 여론은 이런 '잔혹한 제국주의'에 대해 안타깝게 여겼다.[11] 이후 몇십 년 동안, 미국 정치인과 사절단, 사업가들은 청나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청나라가 미국처럼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12]
그러나 문호개방정책이 미국 정계의 기본 이념이긴 했지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20년대 북벌 당시 발생한 5·3 참변과 산동 출병, 1931년 만주 사변,[13] 그리고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우드로 윌슨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다.[14] 역으로 청나라와 이후 중국 정부 정계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했지만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할 생각이 없었다.[15]
1917년 랜싱-이시이 협정을 통해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중국의 영토를 분할하지 않기로 합의했지만,[13] 같은 해 일본 정부는 협상국과 비밀 협약을 맺어 제1차 세계 대전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면 독일의 영향권인 산둥반도를 일본이 차지하기로 약속했다.[7] 실제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회의인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측에 유리한 조건이 전부 들어간 내용으로 회의가 진행되고, 당시 중국 정부가 일본 측의 21개조 요구에 굴복하려고 하자 중국 민중은 이에 분노해 1919년 5·4 운동을 일으켰다.[16][17] 중국 정부는 중국 민중의 요구에 응해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대신 1921년 중국-독일 평화회복협정에 서명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일본을 비롯한 협상국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중국 대중은 우드로 윌슨에게 실망했다.[18] 1922년 9국 공약을 통해 문호개방정책의 기본 요지는 다시 확인되었다.[19]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사에서 '문호개방정책'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가리킨다.[2] 1978년 12월 덩샤오핑은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투자하고 싶은 외국 기업에게 시장을 개방하였다.[20] 이에 맞추어 덩샤오핑은 산업 현대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1980년 경제특구가 설치했으며, 경제 정책 역시 외국의 투자를 장려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 경제 정책 전환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21]
20세기와 21세기 용례
크리스토퍼 레인과 같은 학자들은 '문호개방정책'을 세계 기준이나 국제법에 따라 일반적으로 국가가 경제 또는 정치적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탈피하는 과정을 가리켜 사용하였다.[22] 윌리엄 애플맨 윌리엄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문호개방정책을 '미국의 비공식적인 제국 또는 자유무역 제국주의 정책'이라고 묘사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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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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