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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발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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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발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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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발 자매(영어: Mirabal sisters, 스페인어: hermanas Mirabal es)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네 자매로, 이들 중 세 명(파트리아,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사)은 라파엘 트루히요 (엘 헤페) 독재에 반대하며 그의 정권에 대항하는 활동에 참여했다.[1] 세 자매는 1960년 11월 25일에 암살당했다. 당시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막내 여동생 아델라(데데로 알려짐)는 2014년 2월 1일 자연사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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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아,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사 미라발.

자매 중 미네르바는 정치에서 가장 활발한 역할을 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마놀로 타바레스 후스토(Manolo Tavárez Justo)는 6월 14일 혁명 운동을 창설했다. 마리아 테레사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 맏언니인 파트리아는 다른 자매들만큼 정치 활동을 활발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지지했다. 그녀는 반란군으로부터 무기와 도구를 보관할 장소로 자신의 집을 빌려주었다.

자매들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가 영웅으로 간주된다. 그들의 유해는 자매들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에르마나스 미라발 집 박물관에 위치한 국립 판테온의 확장으로 선언된 영묘에 안치되어 있다. 이 암살 사건은 미라발 자매들을 "대중적 저항과 여성주의적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었다.[3] 1999년에 유엔 총회는 그들을 기려 11월 25일을 여성 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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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발 자매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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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발 자매들이 1960년에 살았던 집은 현재 살세도,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박물관이다.

미라발 가족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중앙 시바오 지역 출신으로, 살세도 마을 근처 오호 데 아구아(Ojo de Agua) 마을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인 엔리케 미라발 페르난데스와 메르세데스 레예스 카밀로는 그 지역의 지주였다.[4] 네 자매 모두 고향인 오호 데 아구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라베가 시에 있는 엘 콜레히오 데 라 인마쿨라다라는 로마 가톨릭교회 기숙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5] 라파엘 트루히요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의 사진을 집에 두는 것이 관례였지만, 미라발 가족의 집에는 트루히요의 사진이 없었고, 그 결과 트루히요 정권에 의해 반대자로 간주되었다.[5]

트루히요가 집권하면서 가족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자매들, 특히 미네르바는 독재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믿었고, 6월 14일 혁명 운동의 창설과 조직에 참여했다. 이 그룹 내에서 그들은 라스 마리포사스(나비들)로 알려졌다.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 두 자매는 라 빅토리아와 라 40 교도소에 여러 번 투옥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남편은 트루히요 정권 하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독재에 맞서 싸움을 계속했다.

파트리아 메르세데스 미라발 레예스

파트리아 메르세데스 미라발 레예스(1924년 2월 27일 ~ 1960년 11월 25일), 보통 파트리아로 알려진 그녀는 미라발 네 자매 중 맏이였다. 14세 때 부모님에 의해 라베가에 있는 콜레히오 인마쿨라다 콘셉시온이라는 가톨릭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17세에 학교를 떠나 농부인 페드로 곤살레스와 결혼했는데,[6] 그는 나중에 그녀가 트루히요 정권에 도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파트리아는 세 자녀를 두었다.[5] 그녀는 한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이 부패하고 폭정적인 정권에서 자라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하며, 필요하다면 모든 것,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7]

벨히카 아델라 미라발 레예스

벨히카 아델라 미라발 레예스 (1925년 3월 1일 ~ 2014년 2월 1일), 흔히 데데라고 불리는 그녀는 미라발 가족의 둘째 딸이었다.[8][9] 그녀는 언니들과 달리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전통적인 주부가 되었고,[9] 아버지의 가업을 도왔다. 미라발 가문의 가장인 엔리케는 정치적 투옥 후 사망했고, 데데가 가계 재정을 맡았다. 그녀는 언니들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언니들이 살해된 후, 데데는 그들의 아이들을 돌보고 키웠다.[9]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에 데데는 언니들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미라발 자매 재단과 미라발 자매 박물관을 설립했다.[10] 데데는 가족의 마지막 생존 자매였다. 그녀는 88세에 사망했으며, 평생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고백했다.[11]

마리아 아르헨티나 미네르바 미라발 레예스

마리아 아르헨티나 미네르바 미라발 레예스(1926년 3월 12일 ~ 1960년 11월 25일), 보통 미네르바로 알려진 그녀는 셋째 딸이었다. 12세에 그녀는 파트리아를 따라 콜레히오 인마쿨라다 콘셉시온에 갔다.[6] 1949년, 미라발 가족은 지역 엘리트를 위한 파티에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미네르바는 라파엘 트루히요의 눈에 띄었다. 트루히요는 미라발 가족을 다른 파티에 직접 초대하기까지 했다. 이 파티에서 트루히요는 미네르바에게 더 많은 성적 접근을 시도했다.[12] 미네르바가 트루히요를 거부한 후, 그녀의 부모는 미네르바가 정치에 엮여 결국 죽임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법대에 등록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미네르바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를 보고, 부모는 6년 후 양보했고, 그녀는 산토도밍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나중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미네르바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법대를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었다.[13] 트루히요의 접근을 이전에 거부했기 때문에, 미네르바가 졸업했을 때 그녀의 학위는 명예를 박탈당했고 변호사 자격증은 결국 거부되었다.[5]

대학에서 그녀는 트루히요 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을 줄 남편 마놀로 타바레스 후스토를 만났다. 미네르바는 미라발 딸들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급진적이었다. 신학자 낸시 피네다-마드리드에 따르면, 그녀는 트루히요의 명령에 따라 여러 차례 체포되고 괴롭힘을 당했다.[14] 역사가 버나드 디더리치에 따르면, 미네르바 미라발은 두 번 체포되었다. 그녀는 1960년 1월, 1J4 회원들에 대한 탄압의 물결이 시작될 때 처음 투옥되었고, "수백 명의 1J4 회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15]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는 우리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은 행복의 원천이다.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말했다.[7]

안토니아 마리아 테레사 미라발 레예스

안토니아 마리아 테레사 미라발 레예스 (1935년 10월 15일 ~ 1960년 11월 25일), 보통 마리아 테레사로 알려진 그녀는 넷째이자 막내딸이었다.[16] 그녀는 콜레히오 인마쿨라다 콘셉시온에 다녔고, 1954년 리세오 데 산 프란시스코 데 마코리스를 졸업했으며, 산토도밍고 대학교에 진학하여 수학을 공부했다.[17]

나중에 마리아 테레사는 레안드로 구스만을 만났다. 교제 중에 레안드로가 마리아 테레사의 손을 잡는 것이 허락되기 전에, 그녀는 그에게 그의 가족이 트루히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레안드로는 "...문제없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트루히요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5] 이 대답 후 마리아 테레사는 그가 손을 잡도록 허락했고, 그녀가 교육을 마친 후 결국 결혼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언니 미네르바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받아 트루히요 정권에 대한 비밀 활동에 참여했다.[16][17] 그 결과 그녀는 트루히요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체포되었다.[17][18][14] 그녀는 언니 미네르바를 매우 존경했으며, 미네르바의 정치적 견해에 열정적이었다.[6] 그녀는 한때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죽음일지 모르지만, 그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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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활동

콜레히오 인마쿨라다 콘셉시온에 다니던 중, 미네르바는 친구 데이시 아리사의 아버지가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트루히요에게 살해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을 비롯한 많은 사건들이 결국 미네르바가 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영향을 주었다.[5] 미네르바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 그리고 1942년부터 1952년까지 국가의 공식 대통령이었지만, 1961년 암살될 때까지 배후에서 계속 통치했던 트루히요에 대항하는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네르바의 자매들은 그녀를 따라 이 운동에 참여했다. 먼저 마리아 테레사가 미네르바의 집에서 머물면서 그녀의 활동에 대해 배우고 참여했고, 그 다음 파트리아가 종교 휴양 중 트루히요 부하들의 학살을 목격한 후 참여했다. 데데는 남편 하이미토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사, 파트리아의 남편들은 1J4라는 별명을 가진 6월 14일 운동의 지도자 중 일부였다. 이 운동은 라파엘 트루히요 정권을 전복하려다 살해된 도미니카 반군을 지지하고, 나중에는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15] 파트리아의 십대 자녀들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트루히요가 죽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전단을 배포하고, 결국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 사용할 총과 폭탄을 위한 재료를 구하는 데 도왔다. 그룹 내에서 자매들은 미네르바의 지하 이름에 따라 스스로를 라스 마리포사스("나비들")라고 불렀다.[3] 이 비밀 운동은 창립 몇 주 만에 발각되어 파트리아의 집(그룹이 모이던 곳)이 불타고 마리아 테레사와 미네르바가 체포되었다.[5]

1960년에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는 1월 22일부터 2월 7일까지, 그리고 5월 18일부터 8월 9일까지 투옥되었다.[15] 트루히요 정권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여론이 커지면서 그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파트리아는 체포된 적이 없지만,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수감되었다.[19] 세 명의 남편은 1월에 산토도밍고의 라 빅토리아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11월에는 그들 중 두 명이 푸에르토플라타로 이송되었다.[15]

1960년, 아메리카 국가 기구는 트루히요의 행동을 비난하고 감시단을 보냈다. 미네르바와 마리아 테레사는 풀려났지만, 그들의 남편들은 감옥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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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1960년 11월 25일, 파트리아, 미네르바, 마리아 테레사, 그리고 그들의 운전사 루피노 데 라 크루스는 마리아 테레사와 미네르바의 수감된 남편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파트리아의 남편은 수감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언니들을 도덕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함께 여행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트루히요의 부하들에게 붙잡혔다. 자매들과 데 라 크루스는 떨어져서 목 졸리고[20]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시신은 그들의 차량에 실려 사고처럼 위장하기 위해 산길에서 굴러 떨어뜨려졌다.

1961년 5월 30일 트루히요가 암살된 후, 푸포 로만 장군은 빅토르 알리시니오 페냐 리베라(트루히요의 오른팔)와 그의 비밀경찰인 시리아코 데 라 로사, 라몬 에밀리오 로하스, 알폰소 크루스 발레리아, 에밀리오 에스트라다 말레타에 의해 자매들이 살해되었다는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다.[21] 트루히요가 살인을 명령했는지 아니면 비밀경찰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는지에 대해 한 역사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명령이 국가 주권보다 낮은 어떤 권위에서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트루히요 자신이었으며, 그의 동의 없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22] 또한, 살인자 중 한 명인 시리아코 데 라 로사는 "재앙을 막으려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만약 막았다면 트루히요가 우리 모두를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23]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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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발 가족의 옛집이자 데데 미라발이 2014년 2월 1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집.[9]

역사가 버나드 디더리치에 따르면, 자매들의 암살은 "트루히요의 다른 대부분의 범죄보다 도미니카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살인이 "그들의 마초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6개월 후 트루히요 자신의 암살을 위한 길을 열었다고 썼다.[24]

그러나 미라발 자매 암살의 상세한 내용은 1996년 호아킨 발라게르 대통령이 20년 이상 집권한 후 물러나야 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발라게르는 트루히요의 제자였으며 1960년 암살 당시 대통령이었다 (당시 그는 "트루히요 장군과 거리를 두었고 처음에는 더 온건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25]

1997년 공립학교의 역사 교육과정을 재검토하여 미라발 자매들을 국가적 순교자로 인정했다.[3] 발라게르 시대 이후에는 산토도밍고 국립 역사 지리 박물관에 그들의 소장품 전시회를 포함하여 미라발 자매들에게 바치는 헌사가 현저히 증가했다.

암살 후 살아남은 자매 데데는 언니들의 유산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녀는 언니들의 여섯 자녀를 키웠는데, 그중 미네르바의 딸인 미누 타바레스 미라발은 2002년부터 도미니카 의회 하원에서 국립구 부의원을 지냈고, 그 이전에는 (1996년~2000년)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데데의 세 자녀 중 하이메 다비드 페르난데스 미라발은 환경천연자원부 장관이자 도미니카 공화국의 전 부통령이었다. 1992년에 데데는 미라발 자매 재단을 설립했고, 1994년에는 언니들의 고향인 살세도에 미라발 자매 박물관을 열었다.[9] 그녀는 2009년 8월 25일에 『Vivas en su Jardín』이라는 책을 출판했다.[26] 그 영어판은 2025년 2월 25일에 발표될 예정이다.[27] 그녀는 2014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자매들이 태어난 살세도의 집에서 살았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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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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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하이츠에 위치한 미라발 자매 캠퍼스는 KIPP 워싱턴하이츠, MS 319 마리아 테레사, MS 324 파트리아 미라발을 수용하고 있다.

1999년 12월 17일, 유엔 총회는 자매들을 기리기 위해 11월 25일을 여성 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했다. 이는 성폭력에 반대하는 16일 간의 활동 기간의 시작을 알린다.[1] 그 기간의 마지막 날인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2007년 11월 21일, 살세도 주(Salcedo Province)는 에르마나스미라발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29][30][31][32]

산토도밍고 지하철의 에르마나스 미라발 역은 미라발 자매들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200 도미니카 페소 지폐에는 자매들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들을 추모하는 우표가 발행되었다.[3] 트루히요가 1935년에 수도를 산토도밍고에서 시우다드 트루히요로 개명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137피트 오벨리스크는 자매들을 기리는 벽화로 덮였다. 1997년, 통신 회사 CODETEL(현재 Claro)은 엘사 누녜스의 벽화를 후원했다. 몇 년마다 벽화는 바뀐다.[33] 2005년에는 아마야 살라자르가 작품을 만들었다.[34] 2011년, 반코 델 프로그레소는 더스틴 무뇨스가 벽화를 다시 그리도록 후원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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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데 아구아, 살세도에 있는 자매들을 기리는 기념비

2019년, 미국 뉴욕 워싱턴하이츠의 168번가와 암스테르담 애비뉴의 남동쪽 모퉁이는 뉴욕 시의회에 의해 미라발 자매 길로 지정되었다.[36] 또한, 워싱턴하이츠에 있는 한 학교 캠퍼스는 미라발 자매 캠퍼스라고 명명되었다.[37]

사회 정의와 여성주의의 상징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매들은 사회 활동을 통해 그들의 유산을 살아있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많은 단체들의 설립에 영감을 주었다. 2021년, 프랑스 주재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 로사 에르난데스 데 그루욘은 1960년 트루히요 독재정권 하에서 살해된 유명한 도미니카 저항 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파리에서 기념 명판을 제막했다.[38] 미라발 자매 문화 커뮤니티 센터는 이민 가족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비영리 단체이다.[39]

대중문화에서

  • 1994년 도미니카계 미국인 작가 훌리아 알바레스는 미라발 자매의 삶을 허구화한 소설 나비의 시간을 출판했다. 알바레스는 자매들을 "페미니스트 아이콘"이자 "우리에게도 혁명 영웅, 우리만의 체 게바라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존재"라고 불렀다.[3] 이 소설은 2001년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었으며, 살마 아예크가 미네르바 역을, 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가 트루히요 역을, 가수 마크 앤서니가 조연을 맡았다.[9]
  • 이 자매들은 도미니카계 미국인 작가 후놋 디아스의 2007년 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경이로운 삶』에 언급된다.
  • 이 이야기는 제이콥 쿠슈너의 아동 도서 『나비가 날개를 키운 방법』에서 소설화되었다.
  • 칠레 영화감독 세실리아 도메이코는 미라발 자매에 관한 다큐멘터리 『코드네임: 나비들』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데데와 미라발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9]
  • 배우 미셸 로드리게스는 자매들의 삶을 다룬 영화 트로피코 데 상그레를 공동 제작했으며, 영화에서 미네르바 역을 맡았다. 데데 미라발은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40]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2000년 소설 『염소의 축제』는 트루히요의 암살과 그것이 도미니카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묘사한다. 이 소설은 미라발 자매들을 자주 언급한다.[41] 이 소설은 원래 스페인의 알프과나에서 『La fiesta del chivo』로 출판되었다.
  • 존 M. 추의 2021년 영화 인 더 하이츠동명의 뮤지컬을 기반으로 하며 미라발 자매들을 언급한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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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도미니카 공화국
스페인

같이 보기

  •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성
  • 갈린도의 처녀들
  • 비야 자매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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