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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랄 2 작전

1995년 가을 보스니아 서부에서 진행된 크로아티아군의 공세 작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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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랄 2 작전은 공식적으로 마에스트랄 2 작전(세르보크로아트어: Operation Maestral 2)으로 코드네임이 부여되었으며, 보스니아 전쟁의 일환으로 1995년 9월 8일부터 15일까지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크로아티아 육군(HV)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HVO)가 벌인 공세이다. 작전 목표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스릅스카 공화국군(VRS)이 점령한 지역 사이에 안보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이 작전은 헤르체그-크로아티아인야이체, 시포보, 드르바르를 점령하여 가장 큰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거점 도시인 바냐루카의 점령에 타격을 가하고, 그 유지 능력을 위태롭게 하여 궁극적으로 재탈환으로 이끄는 선봉 역할을 했다. 연합된 HV와 HVO 병력은 HV 소장 안테 고토비나의 총지휘 아래 있었다.

간략 정보 날짜, 장소 ...

이 작전은 NATO가 VRS를 대상으로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이라는 코드네임으로 공중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시작되었다. 이 공중 작전은 주로 사라예보 지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다른 지역에 있는 VRS의 방공망, 포병 진지 및 보급 시설을 목표로 폭격했다. 공세가 시작된 지 며칠 후 HV와 HVO의 진격 좌우에 있는 VRS 진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의 사나 작전으로 공격을 받았다. 이 공세는 목표를 달성했고, 바냐루카를 향한 HV, HVO, ARBiH의 추가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여 전쟁 해결에 기여했다.

이 공세가 사나 작전과 함께 또는 NATO 공습이 보스니아 전쟁 해결에 더 많이 기여했는지, 그리고 ARBiH, HVO, HV의 진격이 NATO 공습에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 사이에 이견이 있다. 미스트랄 2 작전은 수백 명의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간인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수만 명의 다른 민간인을 이주시켰다. 2011년, 전 크로아티아군 병력 5명은 이 작전 중에 5명의 보스니아 세르비아 군인과 1명의 민간인을 즉결처형한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6년,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관료는 크로아티아 국방부 장관 다미르 크르스티체비치를 상대로 그가 이 공세 중에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형사 고발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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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관점

밴스 계획이 수용되고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55,000명의 장교와 병사가 새로운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군대로 편입되었고, 이 군대는 나중에 스릅스카 공화국군(VRS)으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재편성은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실시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국민투표에 앞서 1992년 1월 9일 스릅스카 공화국의 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 선언은 나중에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이 보스니아 전쟁의 구실로 인용하게 된다.[1]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은 1992년 3월 1일 수도 사라예보와 다른 지역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전쟁의 첫 사상자가 사라예보와 도보이에서 기록되었다. 3월 마지막 날,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은 보산스키브로드에 포격을 가했고, 그 결과 크로아티아 육군(HV) 제108여단이 국경을 넘어 작전을 수행했다.[2] 1992년 4월 4일, JNA 포병은 사라예보를 포격하기 시작했다.[3] 1992년 4월 초 즈보르니크 점령 당시 JNA가 드리나강을 넘어 세르비아에서 포병 지원을 제공하는 등 JNA가 VRS를 직접 지원한 다른 사례도 있었다.[4][5] 동시에 JNA는 상황을 완화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다른 지역에서 협상을 주선하려고 했다.[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JNA와 VRS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HVO)를 상대했는데, 이들은 각각 보스니아인이 주도하는 중앙 정부와 크로아트계 보스니아인 지도부에 보고했으며, 때로는 HVO 작전을 지원하는 HV도 있었다.[2] 1992년 4월 말, VRS는 20만 명의 병력, 수백 대의 전차, 병력수송장갑차(APC) 및 포병을 배치할 수 있었다. HVO와 크로아티아 방위군(HOS)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과 소수의 중화기를 동원할 수 있었고, ARBiH는 약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지만 그 절반 미만에 해당하는 소화기만 있었고 중화기는 거의 없었다.[6] 다양한 병력의 무장은 1991년 9월에 도입된 유엔(UN)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7] 1992년 5월 중순, VRS로 편입되지 않은 JNA 부대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새로 선포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으로 철수했을 때[5] VRS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약 60%를 통제했다.[8] VRS의 통제 범위는 1992년 말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약 70%로 확대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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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1995년까지 ARBiH와 HVO는 더 잘 조직된 병력으로 발전하여 비교적 많은 수의 포병과 좋은 방어 요새를 사용했다. VRS는 1995년 5월과 6월의 오라셰 전투에서처럼 병력이 건전한 군사 전술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10] 1995년 8월 폭풍 작전에서 스릅스카 크라이나 공화국(크로아티아의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통제 지역)의 대부분을 재탈환한 후, HV는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공세 초점을 옮겼다. 이러한 전환은 크로아티아 국경을 따라 안전 구역을 만들고, 크로아티아를 지역 강국으로 확립하며, 보스니아 전쟁을 종식시켜 서방의 환심을 사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서부 보스니아와 바냐루카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통제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를 통제하려는 목표에 기여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환영했다.[11]

1995년 8월 마지막 날, NATO는 VRS를 목표로 하는 공중 작전인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을 시작했다. 이 작전은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직후인 8월 28일 2차 마르칼레 학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12] 공습은 8월 30일에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VRS 방공망을 목표로 했으며 사라예보 근처의 목표물을 타격했다. 작전은 9월 1일 잠시 중단되었고[13] 범위가 확대되어 도시 주변의 포병 및 저장 시설을 목표로 했다.[14] 폭격은 9월 5일에 재개되었고, NATO가 사라예보 근처의 목표물 목록을 거의 소진했기 때문에 9월 9일까지 바냐루카 근처의 VRS 방공망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9월 13일,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은 사라예보 주변에 출입 금지 구역을 설정하라는 NATO의 요구를 수용했고 작전은 중단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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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서열

요약
관점

NATO 폭격이 일반적으로 사라예보 주변의 VRS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서부 보스니아는 비하치, 드르바르, 글라모치 근처에서 VRS, HVO, ARBiH가 감행한 탐색 공격을 제외하고는 폭풍 작전 이후 비교적 조용했다. 당시 HV, HVO, ARBiH는 이 지역에서 공동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15] 공세의 주요 방면 작전명은 마에스트랄 작전(크로아티아어로 마에스트로 바람이란 뜻)[16] 또는 더 정확하게는 미스트랄 2 작전으로 코드네임이 부여되었다. 한 달 이내에[17] HV와 HVO는 야이체, 시포보, 드르바르를 점령하고 병력을 배치하여 바냐루카를 위협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소장 안테 고토비나가 공세에 투입된 HV와 HVO 연합군의 지휘를 맡았다.[16]

병력은 세개 집단으로 배치되었다. 시포보야이체 점령 임무를 맡은 북부 작전단(OG North)은 11,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고토비나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부대인 제4근위여단제7근위여단, HV의 제1근위여단 (1. hrvatski gardijski zdrug – 1st HGZ) 및 HVO의 3개 근위여단을 포함했다. 나머지 병력은 서부 작전단(OG West)과 남부 작전단(OG South)으로 조직되었으며, 5개 HV 향토 방위 연대와 3개 예비 보병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두 집단은 드르바르 근처에서 VRS 제2크라이나 군단의 병력을 묶어두고 도시로 진격하려고 했다. 북부 작전단이 임무를 완수하면 드르바르를 점령하기 위해 돌아와야 했다. 고토비나의 병력은 좌측의 ARBiH 제5군단과 우측의 제7군단 사이에 배치되었다. ARBiH 병력은 사나 작전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별도이지만 협력적인 공세로 HV와 HVO의 측면에서 진격해야 했다.[16][18]

HV와 HVO 연합군의 공세 지역에서 VRS는 라디보예 토마니치 소장이 지휘하는 제2크라이나 군단과 모미르 제츠 소장이 지휘하는 제1크라이나 군단 제30보병사단을 배치했다. 드르바르에 본부를 설치한 토마니치 소장은 서부 보스니아의 총지휘를 맡았다. 토마니치와 제츠는 약 22,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그들은 ARBiH를 이 지역에서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여 HV에 직접 맞서는 병력은 5,000명에서 6,000명 정도만 배치했으며, 이는 1개 기동 여단과 6개 보병 또는 경보병 여단이 전선에 배치되었고 1개 여단이 예비대로 배치된 것이었다.[16]

자세한 정보 그룹, 부대 ...
자세한 정보 지역, 부대 ...

전개

요약
관점

1단계: 9월 8일~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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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10월 서부 보스니아 전투 지도. 미스트랄 2 작전은 지도의 왼쪽 하단에 묘사되어 있다.

공세 1단계는 글라모치 북쪽의 산맥을 가로지르는 VRS 방어선을 돌파하여 시포보야이체 남쪽 접근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16] 공격은 9월 8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제7 및 제4근위여단이 각각 믈리니슈테 고개와 야스트레브냐크 언덕을 향해 공격을 선도했다.[24] VRS 방어선의 첫 번째 선은 10:00까지 돌파되어 제1HGZ가 제4근위여단을 뚫고 비토로크산과 특히 강력한 그곳의 VRS 방어선을 우회할 수 있었다. 제1HGZ는 제60근위대대와 특수 경찰의 지원을 받아 비토로크의 VRS 진지를 공격했다. 공세 첫날 달성된 가장 먼 진격은 제4근위여단이 이루어 내 총 5 km 진격했다. 제7근위여단과 제1HGZ는 훨씬 적은 거리를 진격했으며, 그날 드르바르를 향해 시작된 남부 작전단과 서부 작전단의 지원 노력은 거의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22]

9월 9일, HV와 HVO는 제3세르비아 및 제7기동여단의 주요 VRS 방어선 대부분을 격파하여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제1HGZ는 비토로크에서 VRS를 격퇴했고, 제7근위여단은 8 km 진격하여 믈리니슈테 고개를 점령했으며, 제4근위여단은 야스트레브냐크 언덕을 확보했다. 다음 날, HV와 HVO는 제1기갑여단에서 파견된 M-84 전차 대대가 VRS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2 km만 진격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HV와 HVO는 공세의 1단계 목표를 달성했다.[22] 그날, ARBiH 제7군단은 HV와 HVO 공격의 우측 측면을 공격했다. 이들은 도니바쿠프를 끈질기게 방어하는 VRS 병력과 교전했다.[25]

9월 11일, 북부 작전단은 공격 작전을 중단하고 제4 및 제7근위여단은 예비대로 이동했다. 이들은 HVO의 제1 및 제2근위여단으로 교체되었고, 이 여단이 북부 작전단의 선봉이 되었다. 제2근위여단의 탐색 공격은 쿠프레스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야이체를 향해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남부 작전단과 서부 작전단은 드르바르를 점령하기 위해 다시 노력했지만, 포병과 M-87 오르칸 로켓의 지원을 받는 VRS 보병에 격퇴당했다.[22]

2단계: 9월 12일~13일

공세의 2단계는 9월 12일에 시작되었다. 그 목표는 북부 작전단이 글라모치 북쪽의 VRS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후 시포보야이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VRS의 제7기동여단이 시포보를 방어하기 위해 비토로크 근처 진지에서 철수해야 했으므로, HV와 HVO의 빠른 진격은 VRS가 방어선을 강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날, HV는 VRS 기갑 및 포병에 대해 3대의 밀 Mi-24 헬기 공격 작전을 전개했으며, HVO 제1근위여단은 시포보에 도달하여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진격은 시포보 근처의 VRS를 우회하기 위해 진격한 제1HGZ의 지원을 받았다.[22] 이 공격은 제60근위대대, 총참모부 정찰 사보타주 중대,[26] 중포병 및 다연장 로켓의 지원을 받았다. 시포보 주변의 VRS 진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2근위여단은 야이체를 향해 진격하여 그날 밤까지 도시 남쪽 10 km 이내 지점에 도달했다.[22] 진격은 제22사보타주 분견대와 특수 경찰의 지원을 받았다.[27]

9월 13일, 제2근위여단이 야이체에 접근하자 VRS는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니바쿠프에서 철수했고 ARBiH는 마을을 점령했다. HV와 HVO 공세의 좌측 측면에 있던 ARBiH 제5군단은 비하치에서 보산스키페트로바츠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며 VRS 제2크라이나 군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25] HV 제81근위대대는 HVO 공격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되었고, 므르코니치그라드에 접근했을 때 마을을 방어하는 VRS 제7기동여단과 충돌했다.[21] 그날 말까지 제2근위여단은 야이체에 도달했다.[22] 야이체 점령이 임박하자 민간인은 대피했다.[28] 제2근위여단은 버려진 마을에 진입하여[29] 거의 3년 전 브르바스 '92 작전에서 VRS에 빼앗겼던 마을을 재탈환했다.[22] 그 점령은 ARBiH 제7군단이 VRS와 대치하는 전선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하는 것을 막았다. 제7군단은 병력의 상당 부분을 분리하여 제5군단에 증원군으로 보냈다.[25]

3단계: 9월 14일~15일

작전의 3단계는 전반적인 공세의 2차 목표인 드르바르 점령에 집중되었다.[22] 도시 주변의 VRS 방어선은 9월 14일까지 버텼지만, 고토비나가 북부 작전단 예비대에 있던 제7근위여단에서 증강된 대대를 분리하여 드르바르를 공격하게 했다. 서부 작전단과 남부 작전단의 새로운 공격과 ARBiH 제5군단의 보산스키페트로바츠를 향한 빠른 진격이 드르바르를 포위시킬 위협을 가하자 VRS는 도시에서 철수했다.[22]

ARBiH 제5군단은 9월 14일에 쿨렌바쿠프를 점령했고, 다음 날 보산스키페트로바츠를 점령했다. 이들은 드르바르로 가는 도로에서 보산스키페트로바츠 동남쪽 12 km 떨어진 오슈트렐 고개에서 HV 병력과 연결되었다.[25] 하지만 연결은 순조롭지 않았고, 아군 사격 사건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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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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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10월 점령된 지역
  HV와 HVO,   ARBiH 점령 지역

HV와 HVO 연합군은 VRS 방어선을 최대 30 km까지 뚫고 2,500 제곱킬로미터 (250,000 ha)를 점령했으며,[22] HV 작전 기획자의 향상된 능력을 보여주었다.[17] 더 중요하게는 미스트랄 2 작전과 사나 작전은 보스니아 전쟁 종전 직전에 시작된 일련의 공세 중 첫 번째로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들은 남향이동 작전에서 HV와 HVO의 추가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31]

중앙정보국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과 미스트랄 2 및 사나 작전의 효과를 분석하고, NATO 공중 작전이 VRS 전투 능력을 예상만큼 저하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공습이 주로 야전 배치 부대가 아닌 지휘통제 인프라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분석은 NATO 공중 작전이 VRS 능력을 저하시켰지만, HV, HVO 및 ARBiH의 최종 공세가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고 언급했다.[32] 또한 NATO 폭격보다는 지상 공세가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고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책임이 있었다고 결론지었다.[33] 그러나 로버트 C. 오웬은 NATO가 개입하여 장거리 통신을 차단함으로써 VRS 방어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HV가 그렇게 빠르게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4]

미스트랄 2 작전은 거의 동시에 진행된 사나 작전과 함께 이전에 VRS가 통제하던 지역에서 수많은 난민을 발생시켰다. 난민 수는 다양하게 보고되었으며, 2010년 스릅스카 공화국 라디오-텔레비전이 보고한 655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125,000명의 난민부터, 1995년 세르브계 보스니아 언론 출처에서 보고된 약 40,000명의 난민까지 추정치가 다양하다. 후자의 수치는 야이체, 시포보, 므르코니치그라드 및 도니바쿠프의 전체 현대 인구가 도피하거나 대피한 것을 포함한다고 보고되었다.[35] 당시 사라예보의 UN 대변인은 난민 수를 20,000명으로 추정했다.[28] 난민은 브르치코바냐루카 주변의 VRS 통제 지역으로 도피했으며,[29] 폭풍 작전 이후 바냐루카에 피신해 있던 50,000명의 난민이 여기에 추가되었다.[36]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열린 고토비나 외 재판에서 레이노 테우넨스는 검찰 측 감정인 자격으로 미스트랄 2 작전과 폭풍 작전을 비교했다. 테우넨스는 미스트랄 2 작전 이후 민간인 재산과 기반 시설이 덜 위험에 처해 있었다고 지적했는데, 고토비나가 이와 관련하여 훨씬 더 엄격한 명령을 내렸고, 치안을 전담하는 중대를 특별히 지정하고 야이체에 통행금지령을 부과했기 때문이었다.[37] HV와 HVO는 작전에서 74명이 사망하고 226명이 부상당하는 손실을 입었다.[38]

2007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제7근위여단 사령관 이반 코라데 준장이 공세 중 VRS 전쟁 포로 살해를 명령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39] 해당 여단 소속 병사 7명에 대해 전쟁 범죄 혐의가 제기되었고, 글라모치 근처 할라피치 마을에서 VRS 포로 1명과 신원 미상의 남성 1명을 살해하고, 믈리니슈테 마을에서 VRS 포로 4명을 살해하라는 코라데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명시되었다. 피고인 5명은 2011년 10월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2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 중 2명은 징역 6년, 1명은 징역 5년, 나머지 2명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40] 코라데는 2008년 3월 말에 저지른 4중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체포하려던 경찰관들과 대치하다 자살하며 재판을 받지 못했다.[41] 2016년, 세르브계 보스니아인 관료는 크로아티아 국방부 장관 다미르 크르스티체비치를 상대로 그와 다른 고위 크로아티아 관료가 공세 중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형사 고발을 제기했다.[42] 보스니아 정부도 야이체와 도니바쿠프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크르스티체비치를 조사하고 있었다.[42] 1995년 9월 13일, 야이체로 향하던 세르비아 민간인 난민 버스 행렬이 브라브니체 마을에서 총격을 받고 로켓추진유탄에 맞아 불이 붙어 32명이 사망했다. 세르비아 전쟁 포로 9명도 사망했다.[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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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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