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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브루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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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브루벨 (Mikhail Vrubel, 러시아어: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Вру́бель; 1856년 3월 17일 – 1910년 4월 14일)은 러시아 화가이자 제도사, 조각가였다. 회화, 소묘, 장식 조각, 연극 예술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작을 하고 혁신적인 대가였던 브루벨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상징주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이자 모더니즘 미술의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1990년 브루벨의 전기에서 소련 미술사학자 니나 드미트리에바는 그의 삶과 예술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3막 드라마로 보았다. "프롤로그"는 그의 초기 학습 및 직업 선택을 의미한다. "1막"은 브루벨이 제국 예술원에서 공부하고 키예프로 이주하여 비잔틴 미술과 기독교 미술을 공부했던 188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2막"은 1890년 앉아있는 악마로 시작된 이른바 "모스크바 시기"와 일치한다. 1896년 브루벨이 오랫동안 그의 모델이었던 오페라 가수 나데즈다 자벨라-브루벨과 결혼했고, 1902년 쓰러진 악마을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기까지의 시기이다. "3막"은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브루벨이 그의 육체적, 지적 능력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킨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던 시기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 4년 동안 이미 시력을 잃은 브루벨은 육체적으로만 살아있었다.[1]
1880년~1890년 동안 브루벨의 창조적 열망은 제국 예술원과 미술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명한 후원자 사바 마몬토프를 포함한 많은 개인 수집가와, 저널 미르 이스쿠스트바를 중심으로 한 화가와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결국 브루벨의 작품은 미르 이스쿠스트바의 자체 미술 전시회와 세르게이 댜길레프 회고전에 전시되었다. 20세기 초, 브루벨의 예술은 러시아 아르누보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받았다. 1905년 11월 28일, 그는 "예술 분야에서의 명성"으로 회화 아카데미 회원(Academician of Painting)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개인의 내면과 영적인 갈등을 격렬하고도 독창적인 '결정체(Crystallic)' 스타일로 표현했으며, 특히 평생 동안 집착했던 '악마(Demon)' 연작은 그의 고독한 예술혼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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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어린 시절
미하일 브루벨은 1856년 옴스크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군 복무로 인해 끊임없이 이주했기 때문에 브루벨과 그의 누나 안나는 어린 시절을 아스트라한, 하르키우, 사라토프 등 여러 도시에서 보냈다. 그는 세 살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으며, 어머니가 병상에서 종이로 사람이나 환상적인 인물들을 오려주었던 기억은 어린 브루벨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심어준 첫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 연극,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브루벨은 사라토프에 머물 때 개인 교사 안드레이 고딘(Andrei Godin)에게 그림을 배웠다. 당시 사라토프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복사본에 깊은 인상을 받아, 누나의 증언에 따르면 그 그림을 세부적인 부분까지 기억하여 그대로 재현해냈다고 한다.
대학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브루벨은 예술가가 아닌 법조인의 길을 택했다.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삼촌 니콜라이 베셀(Nicolai Vessel)과 함께 지냈다. 그는 법학 외에도 문학, 언어, 역사에 뛰어났으며, 특히 칸트의 미학 이론과 철학에 깊이 몰두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문학 작품의 삽화를 그리는 등 예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도미티에바(Nina Dmitrieva, 브루벨 전기 작가)에 따르면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이 시기의 "문학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주제로 한 삽화인 《아들과 만나는 안나 카레니나》가 있으며, 이는 훗날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형성되기 이전의 "준-브루벨(pre-Vrubel)" 단계로 평가된다. 그는 법학 학위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최하위 등급으로 졸업했지만, 이 기간 동안의 철학적, 문학적 몰입은 훗날 그의 상징주의 예술의 깊은 내면성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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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아카데미와 키이우)
대학 졸업 후인 1880년, 브루벨은 갑작스럽게 "제국 미술 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 입학하여 24세의 나이로 뒤늦게 정식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미술계의 권위 있는 스승이었던 파벨 치스탸코프의 스튜디오에서 수학하며 단기간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다.
1884년, 브루벨의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키이우로 가서 명성이 높았던 성 키릴 교회(St. Cyril's Church)와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의 복원 및 장식 작업에 참여했다. 여기서 그는 비잔틴 미술과 초기 기독교 프레스코화에 깊이 몰두하게 된다. 이 작업은 그가 당대의 사실주의(이동파)나 고전주의 아카데미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성 키릴 교회에서 《성모와 아기(The Virgin and Child)》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이는 고전적인 이상미를 넘어 신비롭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강렬한 감정이 담긴 비잔틴 양식의 재해석으로 평가받는다.
188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나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 특히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나 티치아노(Titian)의 색채와 기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르네상스 회화의 엄격한 구조를 흡수하여 그의 비잔틴 스타일과 융합시켰다. 그러나 키이우에서의 창작 활동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했고, 당시의 미술계에서 그의 혁신적인 예술은 공식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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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모스크바 시대)

1890년, 브루벨은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기며 그의 예술 세계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 시기의 시작은 그가 평생 집착하게 될 주제인 《앉아 있는 악마》의 완성으로 상징된다. 미하일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의 시 악마에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 상징주의의 선언문과도 같았다. 브루벨의 악마는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고 고독하며,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의 갈등과 영원한 의문을 구현하는 비극적인 존재였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철도 사업가이자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던 사바 마몬토프를 만났다. 마몬토프의 아브람체보(Abramtsevo) 공방에서 브루벨은 도자기, 마욜리카(Majolica, 유약을 바른 도자기), 무대 장식 등 장식 미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마몬토프가 소유한 모스크바의 저택을 위한 장식 패널과 극장 무대 디자인을 맡았고, 이는 러시아 아르누보 양식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896년, 브루벨은 오페라 가수 나데즈다 자벨라(Nadezhda Zabela)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오랜 뮤즈가 되었으며, 오페라 배역을 맡은 아내의 모습을 그린 《백조 공주》와 같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들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아내의 아름다운 외모와 무대 예술의 융합을 담아내며 브루벨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1902년 《쓰러진 악마》(The Demon Downcast)를 완성하면서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브루벨은 이 작품을 전시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림을 수정하고 악마의 얼굴을 다시 그리는 강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입원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의 내면적 고통과 창조적 광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유작이 되었다.
말년

1903년부터 1910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브루벨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기간을 보냈다. 그는 매독으로 인한 신경계 질환인 타베스 도르살리스(Tabes dorsalis)와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를 동시에 앓고 있었다.
투병 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특히 표도르 우솔체프(Fedor Usoltsev)의 사설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브루벨은 주변 인물들(의사, 환자, 간호사)과 간단한 정물(유리잔 속의 장미)을 소재로 뛰어난 연필 드로잉과 수채화 작품들을 남겼다. 이 후기 작품들은 그의 천재성이 쇠퇴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강렬한 주관적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때로는 불면증(Insomnia) 시리즈와 같이 그의 고통스러운 내면 상태를 가감 없이 반영했다.
1906년부터는 실명에 이르러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고, 이후 4년간은 육체적으로만 존재하다가 19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길고 고통스러웠던 예술적 여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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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스타일
미하일 브루벨의 그림 스타일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완전히 뒤엎고 모더니즘의 길을 연 독창적인 특징을 가진다.
결정체적 분할 (Crystallic Fragmentation): 브루벨 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형태를 마치 결정체(Crystal)나 보석의 파편처럼 날카롭고 각진 작은 면들로 분할하여 표현했다는 점이다. 인물의 피부, 옷의 주름, 심지어 배경의 하늘까지도 이러한 구조적인 분할로 이루어져 있어, 그림에 독특한 입체감과 영롱한 질감을 부여한다. 이는 시각적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사물의 근원적인 형태와 내재된 영적 에너지를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색채의 상징성: 그의 색채는 비잔틴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받은 차갑고 정제된 색상과, 모스크바 시대의 장식 미술에서 발전된 강렬하고 풍부한 색상이 공존한다. 특히 자주색, 청록색, 금색 등은 그의 작품에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이는 상징주의 화풍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극도의 개인주의와 문학성: 브루벨은 당시의 예술 사조(이동파의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와 거리를 두었으며, 그의 작품은 극도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다룬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문학적 또는 연극적 원천, 특히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나 푸시킨,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러한 '문학성'은 그의 그림이 단순한 묘사를 넘어,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러티브를 담게 만들었다.
아르누보와의 연관성: 그의 스타일은 벨기에의 아르누보와 유사한 장식성, 실루엣의 강조, 선의 유기적인 흐름 등을 보여주며, 러시아 아르누보(Modern) 운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회화와 응용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그림, 도자기, 건축 장식 등 모든 분야에서 통일된 예술적 미학을 구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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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브루벨은 생전에 주류 예술계로부터 끊임없는 오해와 비판을 받았으나, 그의 예술은 20세기 초 러시아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선지자로 재평가되었다.
러시아 상징주의의 정점: 브루벨의 '악마' 연작을 비롯한 신비적이고 개인적인 주제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시각 예술적 정점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외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내면, 영적 갈등, 그리고 우주의 신비에 대한 깊은 탐구를 제시함으로써 후배 상징주의 예술가들에게 사상적 깊이를 제공했다.
'미르 이스쿠스트바'와의 연관성: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와 알렉상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가 주도한 미르 이스쿠스트바(예술 세계)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 그룹의 전시회와 회고전은 브루벨의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그룹의 예술가들은 브루벨의 장식성, 스타일화, 그리고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는 정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개인주의와 형식의 혁명: 브루벨은 당대의 어떤 흐름에도 종속되지 않은 고독한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치스탸코프의 아카데미즘을 기초로 삼았지만, 곧 이를 파괴하고 비잔틴, 르네상스, 상징주의를 융합한 독자적인 '결정체' 양식을 창조했다. 이러한 형식적 혁명과 예술을 통한 고통의 승화는 20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이 형식과 재료의 실험을 시도하는 데 간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블라디미르 레냐신(Vladimir Lenyashin)과 같은 평론가들은 브루벨의 위상을 신고전주의의 알렉산드르 이바노프(Alexander Andreyevich Ivanov)와 견줄 만큼 러시아 모던 예술의 혁명적 축으로 높이 평가했다.
브루벨의 작품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옴스크 브루벨 미술관, 키예프 미술관, 오데사 미술관, 벨라루스 국립 미술관 등에서 전시되고 있다.[2] 옴스크, 키예프, 보로네시, 모스크바, 사라토프, 오데사에는 브루벨의 이름을 딴 많은 기념물과 물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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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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